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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배 Oct 30. 2022

카드깡

회사가 전쟁터면 PTSD는 어쩌죠? 6화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명절 영업을 마친 뒤에는 똑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그동안 나는 실적을 많이 올렸다. 팀장님의 신뢰도 회복했다. 거래처는 10개로 늘었고 C마트와 비슷한 규모의 A마트를 하나 더 맡았다. A마트에게도 비슷한 방법을 썼다. 회사가 허용하는 가격보다 싸게 물건을 밀어 넣었다. 잔고가 생기면 나머지 8개 거래처를 활용해 정리했다.


7월의 어느 날,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동기인 민성을 만났다. 할인점 팀 소속으로 해병대 출신인 팀장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터라 동기들이 많이 부러워했다.

“형, 퇴근해요?”

“퇴근하지. 너는 어디가? 너도 퇴근이겠지?”

“퇴근이죠. 형, 요새 어떻게 지내요? 우리 술 한잔해야죠.”

“그러게. 혹시 오늘 괜찮아? 괜찮으면 한잔 먹고 집에 가자.”


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함께 갔던 양꼬치집으로 갔다. 2인분을 주문한 뒤 맥주를 따랐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에 건배를 하고는 대화를 이어갔다.


“형, 근데 얘기 들었어요?”

“응? 무슨 얘기?”

“할인점에서 사고 하나 터졌던데.”

“뭐야, 나 전혀 몰라. 얘기 좀 해줘.”

“확실하지는 않아요. 비밀로 해줘야 돼요. 우리 저번 달에 출시한 제품 있잖아요. 회사에서 야심 차게 준비했는데 매출이 안 나오나 봐요. 그래서 이번에 행사 진열대를 아예 따로 만들었거든요?”

“나도 봤어. 우리 동네 할인점 가니까 진열대 있더라. 엄청 크던데?”

“네, 그거예요. 하여튼 행사 성공해야 한다고 엄청 쪼아댔나 봐요. 큰 거래처에는 파견직 사원분들 1명씩 추가 투입해서 영업시켰어요. 할인점 영업시간 내내 그것만 팔라고.”


우리 회사에는 자회사가 있었다. 회사 산하의 인력소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분들의 업무는 거래처 파견이다. 매장에는 매장 직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납품업체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섞여있다. 시식행사도 여기에 포함된다. 원래 목적은 거래처에 상주하면서 회사 제품의 진열과 판매를 담당하는 것이지만, 자기 일만 할 수는 없다. 매장 일을 회사 일과 병행한다.


대부분 40대 이상의 주부였고 성실하게 일했다. 영업사원의 업무 중에는 거래처 관리도 중요하지만 이 분들을 관리하는 일도 중요했다. 파견직 분들이 능숙하면 영업사원이 할 일이 줄어든다. 반대라면 파견직 분들과 거래처의 갈등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덧니 선배의 특기는 파견된 직원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여유시간이 많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할인점 큰 곳은 보통 2명 상주하잖아. 거기에 판매사원 1명을 추가로 넣었다고?”

“네. 신제품 행사 목적으로만요.”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그런데 그게 왜 큰일이야?”

“그건 큰일이 아니죠.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영업사원 하나가 매출 욕심이 났나 봐요. 사실 할인점은 영업사원이 할 수 있는 게 적잖아요. 기껏해야 특판 정도랄까?”

“특판 가지고 장난쳤구나?”

“장난 정도면 다행이죠. 장난 안치는 영업사원이 어디 있어요?”


특판은 특별판매의 줄임말이다. 거래처를 통해 외부 판매를 하는 경우를 말한다. 대충 이렇다. A라는 업체가 회사 기념일 상품을 물색한다. 할인점에 가서 물건을 보고 원하는 가격을 부른다. 할인점은 우리 회사에 소식을 알려준다. 회사에서 제품 팀과 협의를 하여 할인점에 물건을 납품한다. 할인점에서 A업체에 물건을 판매한다.


할인점도 좋고 회사도 좋은 구조다. 둘 다 매출을 올리기 때문이다. 할인점 영업사원에게는 효과적인 무기 중 하나였다. 할인점은 개별 영업사원이 가격협상을 할 수 없다. 행사 상담도 할 수 없고, 진열을 바꾸기도 힘들다. 모든 전략은 회사 대 회사로 결정된다. 각 할인점 전략을 통째로 담당하는 본부 영업사원이 할인점의 바이어와 협상을 한다. 협상이 완료되면 지시가 전국의 거래처로 하달된다. 이때 할인점 영업사원과 매장의 직원이 합심해 지시를 빠르고 정확하게 이행한다.


지점 영업사원이 전략부터 실행, 수금까지 책임진다면 할인점 영업사원은 실행에 전념했다. 때문에 지점과는 다른 스트레스가 있었다. 권한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특판은 달랐다. 외부 업체만 잘 섭외하면 매출을 크게 올릴 수도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는 영업사원은 회사의 모든 기념품을 자기 거래처와 연결했다.


“영업사원이 특판 업체를 구했나 봐요. 그런데 업체 측에서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했어요. 영업사원은 초조해졌죠. 빨리 실적을 뽑아야 하니까. 그래서 파견사원에게 일단 카드를 긁으라고 한 거예요. 나중에 특판 업체가 결제하러 오면 파견사원 카드는 취소하고 업체 카드로 결제하면 된다고. 파견사원분은 수백만 원을 긁었나 봐요.”

“왜 법인카드로 안 하고 파견사원 카드로 해?”

“월말에 법인카드 내역서 제출해야 되잖아요. 사실 그러면 자기 카드로 했으면 되는데.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요. 근데 그다음이 문제예요. 업체 측에서 특판을 안 한다고 한 거죠. 애초에 상담만 했지, 결정한 건 아무것도 없지 않냐면서.”

“계약서를 안 쓴 거야?”

“그런가 봐요. 구두로 확답을 받지도 못한 것 같아요.”

“와, 큰일 났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거기서 잘못 인정하고 멈췄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대요. 파견사원에게 좀 기다려달라고 한 다음 묵묵부답이었나 봐요. 파견사원 분은 애가 타죠. 카드대금을 갚아야 하니까. 계속 전화하니까 영업사원이 화내면서 반 협박했대요. 우리 공범이라고. 걸리면 둘 다 날아가는데 괜찮겠냐고.”

“진짜로? 대박이네. 근데 어떻게 알려진 거야?

“파견사원 남편 분이 노발대발했나 봐요. 카드 값 보고 눈이 돈 거죠. 무슨 놈의 회사가 양아치 짓을 하냐고 다니지 말라고 했대요. 파견사원 분은 알았다고 했고 바로 팀장님에게 전화 넣었나 봐요. 퇴사하겠다고, 그런데 할 말이 있다고.”


충격적이었다. 영업을 하면서 수많은 장난질을 했지만 차원이 달랐다. 카드 이야기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영업사원이 먼저 결제하고, 업체가 나중에 카드를 교체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업체가 취소하는 경우도 없진 않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파견사원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협박까지 하며 숨긴 경우는 없었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입사할 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어느 시점에서 어긋난 걸까?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파견사원이랑 영업사원은?”

“파견사원은 모르겠어요. 영업사원은 권고사직당하지 않을까요? 계속 다니진 못할 거 같아요.”

“그렇겠지. 선을 좀 넘었지.”

“그게 끝이 아니네요. 이번 건으로 본사에서 감사 나올 수도 있대요. 영업현장에서 공공연히 허용되는 관습들, 뿌리 뽑아야 한다고. 그래서 형에게 말하는 거예요. 할인점보다는 지점 쪽에 타격이 있을 것 같아서. 지점은 전산에 안 잡히는 거래도 많잖아요.”


지점에는 비상이 걸렸다. 먼저 상무님이 영업지원 팀을 호출했다. 얘기가 끝나자 영업지원 팀장이 다른 팀장들을 호출했다. 마지막에는 지점은 지점끼리, 할인점은 할인점끼리 회의를 했다. 사무실 분위기가 싸늘했다. 자리에서 전화통화를 하기도 눈치가 보였다.


회의에서 돌아온 팀장님이 팀원 전부를 호출했다. 13명이 사무실 중간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섰다. 팀장님의 표정은 심각했다. 한숨을 쉬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


“전수조사를 하기로 했다. 각자 잔고가 있는지, 있으면 얼마나 있는지 솔직하게 적어내. 근영이가 양식 만들어서 배포해줘. 외근 나가기 전까지 취합해서 나한테 전달해주고. 솔직하게 적어라, 솔직하게. 마지막 기회니까.”


해결책은 이랬다. 지점 입장에서 가장 불안한 점은 잔고였다. 그중에서도 영업사원의 욕심으로 인한 잔고였다. 회사의 가격 정책을 어기고 물건을 납품했다는 사실은 치명타였다. 이에 영업지원 팀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예산을 타올 테니 비용을 들여서 잔고를 정리하자고. 정리한 흔적은 영업지원 팀에서 처리해 보겠다고 했다. 깔끔하진 않지만 최선인 듯했다.


다들 눈치싸움을 했다. 사실대로 말할 것인가, 끝까지 숨길 것인가. 나도 고민이 됐다. 감사가 확정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로는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10개 거래처를 통틀어 4백 정도의 잔고가 있었다. 지난달 말에 매출을 위해 무리한 결과였다. 하지만 불안하진 않았다. 충분히 통제 가능했다. 월말까지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은 불가능했다. 다음 주라도 감사가 나오면 틀림없이 걸릴 것이다. 시간은 어느새 10시에 가까워졌다. 팀장님이 독촉하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솔직함을 택했다. 전산으로 장난을 치며 실적을 냈지만 더 이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변명이지만 그 순간에는 그랬다. 솔직하게 적어낸 사원들은 끌려가서 꾸중을 들었다. 예산이 각 팀으로 배정됐고 잔고는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이틀 뒤, 사무실이 뒤집어졌다. 진짜로 감사가 나온 것이다. 5년을 일한 덧니 선배도 감사가 나온 건 처음이라고 했다. 다행히 심하진 않았다. 상무님과 영업지원 팀이 사전에 협상을 한 것 같았다. 서울 영업본부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했고 처리했다고 한 모양이다. 감사 팀은 실제로 조사가 이루어졌는지, 잘 처리가 되었는지 검사만 할 예정이었다.


모두가 안심하고 있었다. 숨길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이미 처리를 했다. 숨길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게 꼭꼭 숨겨 두었다. 작정하고 들쑤시면 찾을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권상무의 파워도 컸다. 회사에서 밀어주는 인물인 만큼 함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커리어에 흠집이 생기면 위로 끌어올리기가 힘들어지니까.


반전은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제품 이동 신청서였다. 기억하는가? 한 거래처에서 다른 거래처로 물건을 옮긴다는 신청서다. 승인이 나면 전산상으로 매출이 이동한다. 잔고를 정리하기 위해 종종 썼던 방법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전산상으로는 물건을 옮긴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트럭을 섭외한 기록은 없었다. 당연하겠지. 전산상으로만 한 짓이니까. 그게 문제였다.


생각도 못했다. 나도, 팀원들도, 팀장님도, 영업지원 팀과 상무님까지. 제품 이동 신청서가 문제가 될 거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감사 팀은 이에 대해 추궁했다. 몇몇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제품 이동이 잔고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다시 조사가 시작됐다. 팀장님은 이번에야말로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이번에도 숨기면 다음은 없다고 말했다. 감사 팀과 영업지원에서 추가로 확인할 거라면서.


숨어있던 사람들이 자백했다. 상무님과 영업지원 팀장, 감사 팀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사건은 자백한 사람들의 팀 이동으로 마무리됐다. 몇몇은 할인점으로 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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