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점 팀의 인원은 총 7명이었다. 사무직 여사원까지 합하면 8명. 인원이 적기에 하나의 공간을 두 팀이 나누어 썼다. 복도식 공간의 왼쪽을 우리 팀이, 오른쪽을 옆 팀이 썼다. 팀 구성은 팀장님 1명, 과장급 2명, 대리급 2명, 신입사원 2명이었다. 신입사원은 나보다 1년 후배였다. 이제 막 거래처를 받은 참이었다.
내가 맡게 된 경로는 SSM이었다. SSM의 사전적 의미는 기업형 슈퍼마켓이다. 할인점보다는 작지만 동네 슈퍼보다는 크다. 주로 대기업 산하의 유통경로였다. 민성도 SSM을 담당하고 있었다. 보통 1,2년 차까지는 SSM을 맡고 3년 차가 넘어서면 할인점을 맡았다. 할인점은 거래처 하나하나의 매출이 어마어마했다. C마트는 상대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팀에는 사람이 부족했다. 원래는 2명분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팀원 1명이 맡는 거래처가 너무 많았다. 팀장님은 인력 보충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결국 신입이 배치되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신입에게는 많은 거래처를 맡길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필요했던 거다. 잠깐이라도, 신입이 적응할 때까지라도 2명분의 거래처를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내가 맡은 SSM 거래처는 40개였다. 민성의 거래처보다 2배가 많았다. 신입은 10개를 맡았다.
지점 출신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신입의 거래처 중 2곳은 진상이었다. 그중 1곳이 유독 심각했다. 직원은 40대였는데 깐깐하고 다혈질이었다. 일보다는 부동산 투기에 관심이 많았다. 신입은 이 직원으로 인해 퇴사를 고민했다. 팀장은 아찔했을 거다. 기껏 인력을 보충했더니 곧바로 퇴사하려 한다니. 소방수가 필요했다. C마트를 맡았던 나를 떠올렸다.
평균보다 2배 많은 거래처에 진상 처리. 팀장님의 의도는 명확했다. 내가 버텨주는 동안 신입이 적응한다. 그때가 되면 거래처를 나눈다. 멋진 전략이었다. 내가 퇴사할 가능성은 없을까? 팀장님은 없다고 판단했다. 힘들다는 지점에서, 악명 높은 C마트와 함께 일했다. 나이도 30대라 퇴사하면 갈 곳이 없다. 팀장님은 제품 팀 출신답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나도 반쯤 체념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 어디 있으랴. 이제는 도망칠 곳도 없었다. 진상 거래처로 이동해 인수인계를 받고, 2시간 동안 담당 직원과 대화를 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자기 스타일이 워낙 확고했을 뿐. 의외로 관계는 쉽게 개선되었다. 물론, 순탄치는 않았다. 1주일에 한 번은 2시간씩 이야기를 들어줘야 했다. 회사에 대한 불만부터 부동산 이야기까지.
팀을 옮긴 이유는 확고했다. 잔고와 수금이 싫었다. 매달 조마조마한 기분이 싫었다. 매출 압박은 피할 수 없었다. 영업사원이니까. 권상무가 있으니까. 영업이 싫다면 퇴사하는 게 답이었다. 물론 퇴사할 수는 없었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영업은 하되, 다른 방식으로 하고 싶었다. 좀 더 정석적인, 혹은 정상적인 방식으로. 그래서 할인점을 택했다. 새로 시작해보려 했다.
덧니 선배의 조언도 영향을 줬다. 영업을 잘할 수 있다면 지점을, 그게 아니라면 할인점에 가라는 말. 할인점이 쉽다는 말은 아니었다. 본부에서 행사 협상을 하기에 어느 정도는 묻어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설득력이 있었다. 조금만 느슨해지고 싶었다. 지점에서의 1년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탈모가 왔고, 살이 7kg 빠졌다. 휴대전화가 울리면 깜짝깜짝 놀랐다.
또다시 명절이 가까워졌다. 팀 전체가 바짝 긴장했다. 권상무는 독이 올라 있었다. 저번 명절, 서울본부의 실적에 만족하지 못했다. 게다가 중간에는 감사가 있었다. 큰 타격 없이 무마했지만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상태였다. 권상무는 매출 목표를 더욱 높게 잡았다. 더 많은 지표를 뿌리며 타이트하게 관리할 것을 선포했다. 영업지원 팀은 주력 상품 하나하나에 대한 목표 달성 현황을 공유했다. 각 팀의 팀장님들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서울본부는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어떻게든 매출을 낸다는 심산이었다. 주말 출근 요청이 떨어졌다. 표면상으로는 자율참여였다. 할 사람만 하자는 식이었다. 하지만 나도 눈치가 있었다. 이미 한 번 겪어봤으니. 서울본부 전원은 주말 내내 출근했다. 빠진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다.
우리 팀의 에이스는 수혁 과장님이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나 30대 후반이었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까칠한 분위기를 풍겼다. 파견사원들이 특히 무서워했다. 과장님의 거래처는 명절이 시작되자 앞으로 치고 나갔다. 어마어마한 물량을 삼키며 팀의 매출을 책임졌다. 과장님의 특별판매의 제왕이었다. 많은 업체를 사전에 확보하고 있었다. 명절이 오기 전 중간중간 짬을 내서 특판 업체를 구했다고 했다.
팀장님은 수혁 과장님을 중심으로 전략을 짰다. 나와 신입은 외근을 마치면 수혁 과장님의 거래처로 흩어졌다. 바쁜 할인점 직원들을 대신하여 물건을 체크하고 업체들에게 나눠줬다. 오히려 맘이 편했다. 사람 상대할 일 없이 창고에서 물건만 빼면 되니, 이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밖이 깜깜해질 때까지 한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수혁 과장님 진짜 대단하네요. 어떻게 이만큼 팔죠?”
“그러게 말입니다. 특판 하나는 진짜 잘하시나 봅니다.”
신입과 나는 감탄하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때 담당 직원과 수혁 과장님이 올라왔다. 우리를 보더니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부쳤다.
“이제 내가 할게. 둘은 퇴근해.”
“엄청 많이 남았는데, 괜찮으십니까? 저희도 돕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할 테니까 들어가.”
나는 신입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빨리 집에 가자는 신호였다. 신입도 알아먹은 듯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별생각 없이 물건이 들어오는 쪽 출구로 나갔다. 평소라면 이용하지 않는 통로였다. 그곳에는 커다란 화물차가 한대 있었다. 우리 회사의 물건을 담은 화물차였다. 오전에 들어온 차보다 살짝 커 보였다.
‘물건이 또 들어오나? 창고에도 엄청 많은데, 내일 죽어나겠구먼.’
다음날, 거래처 창고는 그대로였다. 오히려 물건이 조금 줄은 듯했다. 의아했다. 기존 물건에 화물차 하나가 더 들어왔다면 창고가 꽉 차 있어야 정상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녁 사이에 그만큼 팔린 건가? 수혁 과장님 진짜 능력 있네’ 그렇게만 생각했다.
사무실은 여전히 바빴다. 명절 전 마지막 근무였다. 다들 눈은 모니터에 있지만 마음은 붕 떠 있었다. 우리 팀은 그다지 초조하지 않았다. 전체 할인점 팀 중에서 중간 이상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혁 과장님의 공이 컸다. 오전 10시가 되자 슬슬 외근 나갈 준비를 했다.
회전문을 나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덧니 선배가 따라 나왔다.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더니 나를 지나쳤다. 선배는 수혁 과장님에게 볼일이 있었다.
“과장님, 잠시 저 좀 보시죠?”
“나? 나 갑자기 왜?”
“드릴 말씀 있어서요. 비상구 쪽에서 잠깐만 보시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덧니 선배의 귀가 빨개져 있었다. 앞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한 성격 하지만 선배에게 저럴 양반은 아닌데. 수혁 선배는 뭔가 아는 듯했다. 둘은 조용히 비상구로 갔다. 나는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거기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거래처로 차를 몰던 중에 전화가 왔다. 덧니 선배였다. 여전히 흥분한 상태 같았다.
“야, 너 혹시 뭐 아는 거 없냐?”
“아는 거요? 갑자기 무슨 소리세요?”
“그냥, 뭐 아는 거 없느냐고.”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혹시 아까 일과 관련 있나요?”
“아니다. 됐다. 네가 알리 없지. 그건 됐고, 할인점은 할만하냐?”
“뭐 그냥 그렇습니다. 여긴 여기대로 고충이 있네요.”
“내가 그랬잖아. 다 장단점이 있다고. 이왕 간 거 잘해라. 다시 올 생각하지 말고.”
선배는 조만간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덧니 선배는 원칙이 있었다. 거래처 하고는 싸워도 회사 사람들하고는 싸우지 않았다. 사내에 적을 만들어서 좋은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이들도 선배를 건들지 않았다. 매출은 인격이니까. 영업사원은 매출로 말하니까. 지점에서 상위 10명에 드는 선배는 제법 영향력이 있었다. 지점의 팀장님도 덧니 선배에게는 함부로 못했다.
명절 동안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덧니 선배는 왜 화가 났을까? 수혁 과장님은 뭘 알고 있을까? 둘은 비상구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덧니 선배는 답을 얻지 못한 듯했다. 나에게 전화해서 물어볼 만큼 중요한 일이 뭐였을까? 3일 내내 생각했으나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위험한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명절이 끝나고 출근한 날 아침이었다.
전에 얘기했지만 매일 오전 9시에는 전체 메일이 온다. 목표 달성 현황을 알려주는 메일이다. 현황은 지점과 할인점이 따로 집계된다. 지점의 TOP10에는 덧니 선배가 있었다. 하지만 순위가 다소 낮아졌다. 평소에는 5위권 안쪽이었는데, 지금은 간신히 9위에 걸쳐 있었다. 할인점 TOP10에는 수혁 과장님이 있었다. 나는 엑셀 시트를 넘겨 거래처별 매출 현황을 봤다. 수혁 과장님의 거래처별 매출 달성 현황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다른 거래처는 생각보다 지지부진했다. 한 거래처만 유독 실적이 좋았다. 이미 100%를 초과한 상태였다. 나와 신입이 특판을 도왔던 할인점이었다.
머릿속에서 퍼즐을 맞춰봤다. 화를 내던 덧니 선배, 뭔가 알고 있던 수혁 과장님, 유난히 매출이 튀는 할인점 1곳, 신입과 퇴근하면서 본 우리 물건을 실은 화물차, 대량의 물건이 들어왔음에도 물건이 늘어나지 않았던 할인점 창고.
그날 저녁 덧니 선배를 만났다. 첫 마감이 끝나고 갔던 곱창집으로 갔다. 2층에 올라가 구석에 자리 잡고 곱창 2인분을 주문했다. 소주도 함께 주문했다.
“갑자기 소주는 왜 사달래? 뭔 일 있냐?”
“일단 좀 먹어요. 먹고 나서 말씀드릴게요.”
덧니 선배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별 말하지 않았다. 건방지다고 내 잔에 소주를 가득 따르기만 했다. 나는 그 소주를 다 받아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잔을 따라 건배를 하고 입을 열었다.
“선배, 지난번에 수혁 과장님하고 비상구에서 한 얘기요.”
“지나간 거 뭐 하러 얘기하냐.”
선배는 말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놀란 눈치였다. 대답 없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안주로 곱창을 집어 먹더니 고무줄인 마냥 오래도록 씹었다.
“수혁 과장님 실적이 초반부터 높았어요. 이제 와서 보니 전체 실적은 높은데, 거래처 하나 빼고는 그리 높지 않더라고요. 그 하나가 A할인점이었어요.”
“특판을 잘했나 보지. 특판 고수라며”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여하튼 팀장님 지시로 저하고 신입사원이 A할인점에 투입됐어요. 특판 업체 오면 수량 따라서 물건 옮겨주는 역할을 했어요. 오후에 가면 저녁 내내 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수혁 과장님이 오더니 이만 퇴근하라는 거예요.”
“하루 정도는 쉬게 해주고 싶었나 보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퇴근을 하는데 평소에는 정문으로 나 가거든요? 근데 그날따라 왜 그랬는지 물건 하차하는 쪽으로 나갔어요. 거기에 큰 화물차가 하나 있더라고요. 우리 물건 가득 실은 화물차. 저게 들어가면 창고 꽉 차겠구나. 내일도 바쁘겠구나 생각했죠.”
“그래서? 다음날 죽도록 바빴냐?”
“아뇨. 바쁘긴 했지만 전날이랑 비슷했어요. 창고가 전날이랑 비슷했거든요. 오히려 물량이 줄어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의아했죠. 그 물건은 다 어디 갔을까, 하루 만에 빠지기에는 양이 너무 많은데. 그 정도 양을 소화할 수 있는 특판 업체가 있나? 어디 삼성전자라도 잡았나 했어요.”
“……”
“사실 하나하나 보면 크게 이상한 건 없는데, 모아보니까 이상하더라고요. 거래처 1곳에만 집중된 매출, 명절 전날 화내던 선배, 후배가 대드는데도 별 말 없던 수혁 과장님, 그날 화물차에 실려 있다가 하루 만에 사라진 물건, 마지막으로 항상 매출이 5위권이었는데 9위까지 떨어진 선배.”
“……”
“업자죠? 수혁 과장님이 잡은 특판 업체, 업자 맞죠?”
“……”
“수혁 과장님이 할인점 직원이랑 손 잡고 업자한테 물건 날린 거죠? 우리 지역에 날리면 걸리기 쉬우니까 다른 지역으로 날렸고, 그게 덧니 선배 거래처에 영향을 준 거죠? 선배는 아마 가격을 낮추거나 물량을 줄였어야 될 거예요. 어느 쪽이든 매출은 부러질 거고. 그래서 9위로 떨어진 거죠?”
“반은 맞고 반은 틀려.”
“뭐가 맞고 뭐가 틀린 거예요?”
“심수혁이 물건 날린 건 맞아. 거래처 점장이 업자 얘기하면서 난리 치길래 한번 같이 가봤어. 지네들 거래하는 곳에.”
“점장이랑 같이요?”
“그래, 가서 어디 물건이냐고 했더니 출처를 말해주더라고. 경기도 쪽에서 흘러들어왔다고 하대. 그래서 경기본부 짓인가 했지. 그쪽 동기한테 물어보니까 자기들은 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고, 신규 거래처가 계속 생겨서 매출이 넘친대. 그래서 거긴 제외했지.”
“경기도 쪽이요? 그럼 수혁 과장님이 아닌가?”
“그래서 점장이랑 경기도로 가봤어. 어차피 차로 1시간 거리고 해야 할 일은 다 해놨으니까. 거기 가서 수소문해보니까 너네 지역에서 날아왔더라. 그 정도 규모 날릴 수 있는 할인점은 A할인점 밖에 없고, A할인점은 심수혁 거래처니까.”
“아아, 그런데 경기도로 날린 게 왜 선배 지역으로 간 거예요?”
“물량이 워낙 많았으니까. 처리가 안되니까 다시 서울로 흘러 들어온 거지. 그중 일부가 내 지역으로 왔고. 사실 많지는 않았어. 매출에 타격 입을 정도도 아니었고. 근데 당시에 내 거래처 한 곳이랑 대판 싸웠거든. 열받아서 수혁 과장님한테 화풀이한 거야. 걔는 자기 물건이 서울로 얼마나 되돌아왔는지 모를 테니까. 비상구에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그런 거였네요. 근데 그럼 매출은 왜 떨어진 거예요?”
“말했잖아. 거래처 한 곳이랑 대판 싸웠다니까. 걔네 때문에 진땀 뺐다야. 그래도 다른 곳에 물량 엄청 밀어 넣었더니 10위 안에는 들더라.”
“고수는 고수네요. 그 짧은 시간에. 역시 남달라요.”
“나는 6년 차인데 2년 차인 너랑 비슷해서 되겠냐? 하다 보면 너도 요령 생겨.”
“하다 보면 이네요. 하다 보면.”
“뭔 소리야. 왜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
“선배가 하다 보면 요령 생긴다면서요.”
“그러니까. 그걸 왜 반복하냐고. 너 설마 퇴사하려고 그러냐?”
“잘 모르겠어요. 그냥 ‘하다 보면’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계속해야 되는구나’ 생각이 들어서요.”
“왜 이래? 잔머리의 대가면서. 너 잔고 정리하는 거 보고 나도 감탄했다야.”
“그니까요. 계속 그렇게 해야 살아남나 싶어서요. 저는 솔직히 영업체질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사무실에 들어앉아서 전산 두들기는 게 적성에 맞죠. 문제는 그게 정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회사가 허용한 가격보다 싸게 주고, 잔고 잔뜩 만들고. 정리하려고 가짜 행사 신청서 올리고, 하지도 않은 제품 이동했다고 하고. 거짓말에 거짓말에 거짓말을 더 해서 실적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할인점 간 거 아냐? 가격협상이랑 잔고 정리하기 싫어서?”
“맞아요. 할인점 팀에 가면 정상적인 영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여기도 비슷한 것 같아요. 수혁 과장님처럼 하는 사람 한 둘이겠어요? 매출로 목을 졸라대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으려 하겠죠. 그 과정에서 정석적으로 영업하면 답이 안 나올 테고. 사면이 벽인 방에 갇힌 기분이에요. 정석으로 영업하자니 실력이 없고, 꼼수를 쓰자니 양심이 찔리네요. 지점에서 실컷 하던 건데 이제 와서.”
우리는 남은 소주를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덧니 선배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다. 내부 고발자가 되어봤자 득 될게 전혀 없다고. 지금처럼 하면 어디에선가 불려주지 않겠냐고 했다. 덧니 선배는 가능성이 있었다. 실적이 워낙 좋았으니까. 팀장님들 사이에서 평판도 괜찮았다.
나는 어찌해야 될지 몰랐다. 계속 버틸 수 있을까? 모두가 살아남으려 혈안이 된 이곳에서 5년을, 10년을 버틸 수 있을까? 5년 뒤에는 선배처럼 생각하게 될 테고, 10년 뒤에는 수혁 과장님처럼 생각하겠지. 15년 뒤에는 팀장님들처럼 생각할 테고. 나는 그걸 원하고 있을까?
술자리 이후, 나는 의욕을 잃었다. 외근을 나가면 거래처로 가지 않았다. 근처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매출은 떨어지고 거래처에서 왜 안 오냐고 연락이 왔다. 10월의 어느 날, 나는 팀장님께 면담을 신청했다. 그리고 11월이 오자마자 퇴사했다. 퇴사 소식은 덧니 선배와 보살 선배, 민성이 등 몇몇에게만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