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업본부에는 2종류의 조직이 있다. 하나는 지점, 다른 하나는 할인점. 할인점은 브랜드를 담당한다. 신세계, 롯데, 홈플러스에서 운영하는 유통채널이 주 거래처다. 이마트와 이마트 에브리데이, 롯데마트와 롯데슈퍼, 홈플러스와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를 생각하면 된다. 각 경로마다 회사를 대표하는 본부 영업사원이 있다. 거래처의 바이어와 상담하여 전체 거래처의 방향을 결정한다. 할인점 팀에 속한 영업사원들은 위에서 결정한 전략을 빠르고 정확하게 실행한다.
할인점은 지점에 비해 3가지 장점이 있었다. 먼저 가격 협상이 없다. 따라서 가격을 가지고 거래처와 실랑이할 필요가 없다. 가격 협상이 없으므로 잔고가 없다. 정상적으로 영업하면 절대 잔고가 생기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수금이 없다. 회사 대 회사의 계약이므로 본사 차원에서 입금이 이루어진다. 상대 거래처도 모두 대기업이다. 웬만해서는 입금이 잘못되지 않는다.
그 외에 밝고 세련된 분위기, 남녀 성비, 낮은 연령대 등 신입사원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많았다. 야유회를 하면 지점은 백숙 가게를 예약했고, 할인점은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다. 식사 후에 지점은 고스톱을 쳤고, 할인점은 방 탈출 게임을 했다.
지점의 영업사원 몇 명은 할인점으로 가고 싶어 했다. 덧니 선배도, 근영 선배도 할인점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할인점에 가면 잔고, 수금과 헤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감사와 팀 이동으로 사무실 전체가 뒤숭숭한 시점이었다.
외근을 마치고 복귀하자 팀장님이 나를 호출했다. 팀장님은 낯익은 분과 함께 있었다. 할인점을 담당하는 팀장님이었다. 키는 작지만 인상이 좋고, 계산이 빠른 분이었다. 나와도 안면이 있었다. 내가 신입사원 때까지 바로 옆에 있는 지점을 담당하셨다. 올해 권상무가 오면서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그때 할인점으로 옮겨 가셨다.
“신입 때인가? 매일 늦게까지 일하는 모습을 봤어. 그때 참 성실하다고 생각했거든. 어때? 우리 팀에 올 생각 있어? 지금 우리 팀에 인원이 부족해. 너만 괜찮으면 같이 해보자.”
신입 때? 아아, 잔고 때문에 야근하는 모습을 보셨나 보다. 그때는 야근을 밥 먹듯이 했으니까. 할인점의 김 팀장님은 내 의사를 물었다. 우리 팀장님은 말씀이 없으셨다. 예전에도 말했듯이 ‘있는 듯 없는 듯’한 분이다. 지시하면 따르고 부탁받으면 들어준다. 그래서일까? 말이 없으셨다. ‘가고 싶으면 보내주마’라는 인상이었다. 약간은 서운했다. 그래도 열심히 했는데.
“생각해봐. 생각해보고 말해줘. 바로 이 자리에서 결정하기는 힘드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업지원 팀과는 이야기가 끝난 듯 보였다. 내가 알겠다고 하면 바로 팀은 옮겨질 분위기였다.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신입사원 나부랭이한테 거절할 권한이 있기는 한가? 그보다 지점에서 벗어날 절호의 찬스 아닌가? C마트, 가격협상, 잔고, 꼼수와 안녕하고 정상적인 영업을 할 기회 아닐까? 망설여졌다. 정말 망설여졌다.
민성.
“형 잘 생각해 봐요. 할인점에 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니까요. 물론 할인점이라고 다 깨끗하지는 않아요. 짜증 나는 점도 많고요. 하지만 지점보다는 덜 할 거예요. 커리어 면에서도 더 좋고. 어차피 고생해야 한다면 할인점이 낫지 않겠어요?”
보살 선배.
“할인점 갈 거예요? 하긴, 다들 가고 싶어 하지. 나요? 글쎄, 나는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한 5년하니까 다른 팀 가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가면 새로 적응해야 되고, 다시 공부해야 하는데 그럴 의욕이 없어. 익숙한 게 좋아요, 나는. 여기 사람들도 좋고. 지점에 남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덧니 선배.
“가고 싶으냐? 가고 싶으면 가, 인마. 가고 싶은 데 안 가면 나중에 땅 치고 후회한다. 나는 가고 싶은데 못 간 거야. 팀장이 놔주질 않아서. 둘 다 장단점이 있어. 할인점은 잔고가 없지, 그런데 자유도 별로 없어. 본부에서 시키면 그거 하느라 힘들어. 그중에는 쓸데없는 일도 많고.”
“지점은 잔고가 있지. 대신에 자유롭잖아. 행사도 네가 다 조절할 수 있고. 매출만 미리미리 해놓으면 나머지 시간에는 놀아도 상관 안 해. 나 봐. 외근 나가서 게임하다가 복귀하는 거 봤잖아? 잘 고민해봐. 너한테는 중요한 결정이니까.”
의견이 갈렸다. 민성은 할인점을, 보살 선배는 지점을, 덧니 선배는 양쪽의 장단점을 이야기해줬다. 덧니 선배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지점에서 잘할 수 있으면 지점이 낫고, 그게 아니라면 할인점을 가라. 내가 지점에서 잘할 수 있을까? 이때까지 해온 방식이 ‘잘하는’ 걸까? 알 수가 없었다. 나름 최선의 방식이었지만, 원하던 방식은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