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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배 Oct 30. 2022

업자는 누구인가?

회사가 전쟁터면 PTSD는 어쩌죠? 5화

업자.

사전적 의미는 ‘사업을 직접 경영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사전적 의미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업계 이야기를 하려는 거다. 여기서의 업자는 ‘물건을 빼돌리는 사람’이었다. 사내의 누군가와 결탁하여 물건을 싸게 빼돌려서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 인터넷에 검색하면 공식 쇼핑몰도 아닌데 싸게 파는 사람들이 있다. 가짜인가 싶지만 영락없는 정품이다. 어디서 물건을 구했을까? 그들은 둘 중 하나였다. 업자거나, 업자에게 물건을 공급받았거나.


우리에게 업자는 ‘천하의 죽일 놈’이었다. 매출을 방해하는 천하의 쌍놈이었다. 개인마트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대개 마트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고객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이때만큼은 앙숙이 아니라 한 팀이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업자들을 욕했다.


명절을 앞두고 더욱 기승을 부렸다. 민족 최대의 대목이 업자들의 놀이터였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부분은 거래처였다. 업자들 때문에 손님이 빠진다고 했다. 회사 내에서 업자에게 물건을 빼주는 조직을 찾아 벌하라고 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C마트도 전화를 걸어왔다. 소식을 듣자마자 눈이 시뻘게져서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가 한껏 고양돼 있었다. 그럼 그렇지, 네가 가만히 넘어갈 리가 없지.

“담당, 지금 난리 났어. 소식 들었어?”

“소식이요? 무슨 소식이요?”

“이렇게 정보가 느려서 어떡해. 지금 시장에 물건 쫙 풀렸어.”

“업자 얘기하시는 건가요?”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 땐 거야? 도대체 누구야? 업자한테 물건 빼주는 게. 회사 내부 사람일 거 아니야. 찾아서 어떻게 좀 해봐. 이거 마트만의 문제가 아니야. 매출 빠지면 담당도 좋을 거 있어?”

괜히 심술이 뻗쳤다. 어이가 없네. 잔고는 괜찮고 업자는 안 되냐? 사람 피 말리게 한 건 자기도 마찬가진데 선량한 시민처럼 말하고 있어. 울분을 속으로 삼켰다.

“네, 방법을 찾아볼게요. 매출 빠지면 저도 곤란하니까.”


진심이었다. 정말 곤란했다. 겨우 신뢰를 얻었는데 다시 골칫덩이가 될 수는 없었다. 이번에 확실히 굳히기가 들어가야 했다. 매출이 급한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새로 온 상무님 때문이었다.


권상무.

나이가 50이 안되어 보였다. 40대에 상무라니, 엘리트 중 엘리트였다. 이전에는 충청도 본부를 담당했다고 한다. 거기서 큰 성과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본부의 상무가 끝은 아니었을 거다. 더 높은 곳을 노리고 왔겠지.


권상무는 ‘쪼이기’ 전문이었다. 팀장들의 피를 말렸다. 매일 5시 서울지역 지점 4곳, 할인점팀 6팀 중 매출 하위 2팀을 가려냈다. 2팀의 팀장들은 다음날 7시에 있을 회의를 준비해야 했다. 매출 개선방안 보고서 발표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상무는 하루에 4번 3시간 간격으로 매출 진척 상황을 체크했다. 8시, 11시, 2시, 5시였다. 팀장님들은 3시간 간격으로 난리가 났다. 어떻게든 하위 2팀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우리 팀도 다르지 않았다. 팀장님은 20년 회사생활에서 손꼽히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명절 매출이 중요했다. 팀장님은 명절 매출에 사활을 걸었다. 이런 상황에서 업자 핑계는 통할 리가 없었다. 팀장님은 우리의 푸념에 거세게 반박했다.

“쓸데없는 핑계 대지 말고 방법을 찾아봐. 업자 때문에 매출이 빠진다고? 그럼 너희가 업자한테 물건을 빼줘. 그렇게라도 넘기면 매출 올라가잖아.”

이쪽은 가망성이 없었다. 권상무와 팀장은 설득이 불가능했다. 상무가 매출에 미쳤다. 팀장도 매출에 미쳤다. 그렇다면 나도 매출에 미쳐야 했다.


오전 10시 외근을 나와 C마트로 향했다. 매출을 끌어올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도착하니 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장 바깥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나를 보고 아는 체를 하더니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문질러 껐다. 곧바로 담배 하나를 다시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러니까 담당 말은, 별다른 조치가 없을 거라는 거지?”

“그럴 것 같아요. 권상무는 매출밖에 모르는 양반이라.”

“지점 매출이 줄어들어도, 어디선가는 매출이 난다 이거네.”

“그렇죠. 권상무는 서울본부 담당이고, 업자에게 나간 것도 서울본부 매출이니까.”

“이렇게는 명절 장사 못해. 담당이 나 좀 도와줘야겠어.”

“제가 어떻게요?”

“행사 가격을 좀 더 낮춰줘.”

“설마 업자가 제시하는 가격 수준까지요? 그렇게는 못해요. 절대 불가능해요.”

“누가 다 낮춰달래? 딱 3개 품목만 가격 맞춰줘.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나도 벼랑 끝이야. 만약 담당이 안 맞춰주면 시장에서 업자한테 사 오는 수밖에 없어.”


그 무렵, 거래처에겐 광고 문자가 빗발쳤다. 업자들이 보내는 문자였다. 문자에는 행사상품의 가격이 하나하나 쓰여 있었다. 엄청나게 쌌다. 내가 거래처라도 물건을 받고 싶을 정도로.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시작은 권상무였다. 권상무가 매출로 압박하자 팀장들은 영업사원을 쪼아댔다. 매출이 절박했던 영업사원이 물건을 빼돌렸다. 업자들은 제품을 꿀꺽해서 시장에 풀었다. 개인마트는 이 물량 때문에 고객을 잃었고, 그 여파가 나에게 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를 생각해봤다. 권상무나 팀장님을 설득할 수 있을까? 아니었다. 물건을 빼돌린 영업사원을 찾을 수 있나? 힘들었다. 더구나 찾으면 어떡할 건가? 상무에게 보고할 텐가? 상무에게 보고하면 사태가 해결될까? 애초에 한통속이 아닐까? 업자들은 어떨까? 내가 꼬리를 잡을 수 있을까? 잡으면 내 커리어에 뭐가 좋은가?


결론이 나왔다. 내게 필요한 건 진실이나 정의가 아니었다. 생존해서 회사에 인정받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려면 매출이 나와야 한다. 특히 명절 대목을 잡아야 한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점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3 품목은 업자 수준으로 가격 맞춰 드릴게요. 대신 저 팍팍 밀어주세요.”

“물론이지. 이제 말이 통하네. 발주 많이 할 테니 마음의 준비하라고.”


점장은 악당이었다. 내 기준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거짓말쟁이는 아니었다. 1월이 되자 엄청난 양의 주문이 들어왔다. C마트의 월평균 매출은 4~5천이었다. 명절에는 8천 수준이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매출 9백만 원이 떴다. 산술적으로 10일이면 매출 100%가 가능했다. 목표 달성 현황의 내 순위는 단숨에 10위권으로 올라갔다. 팀장님은 어깨가 으쓱했다.


당연히 잔고도 늘어났다. 일주일 만에 잔고가 3백만 원을 돌파했다. 매출 순위는 2위였다. 나는 다른 의미로 ‘탁월한 영업사원’이었다. 선배에게 배운 가짜 행사 신청서와 제품 이동 신청서를 현란하게 활용했다. C마트만으로는 잔고를 정리할 수 없었다. 나머지 4개 거래처까지 건드렸다. 회사 전산을 들쑤시며 숫자를 바꿔 나갔다.


먼저 C마트의 행사 신청서를 썼다. 과거에 했던 것처럼 신청할 수 있는 제품은 모조리 신청했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이전에 정리한 목록이 있었으므로. 기획서 틀도 갖추어 놓았다. 시간은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신청서가 모두 승인되면 남은 금액은 2백만 원. C마트 전산에 뜬 매출이 2천8백이라면 우리 회사 전산 있는 매출은 3천이었다.


그다음 날에는 제품 이동 신청서를 썼다. 트럭을 섭외해 C마트에 있는 상품 2백만 원 치를 S마트, Y마트 등 나머지 4곳으로 옮겼다고 썼다. 실제로는 전혀 옮기지 않았다. 전산상의 매출만 이동한 것이다. 이로써 C마트 전산에 있는 매출은 2천8백만 원, 우리 회사 전산에 있는 C마트의 매출도 2천8백이 되었다.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C마트는 정상이 되었으나 나머지 거래처에 2백만 원의 잔고가 생겼다. 해결방법은 간단했다. 거래처 4곳의 행사 신청서를 썼다. 역시 실제로는 진행하지 않은 행사였다. 승인이 되자 회사 전산상의 매출이 깎였다. 중형 거래처 2곳에서 120만 원을 깎고, 소형 거래처에서 80만 원을 깎았다. C마트보다는 오래 걸렸다. 축적해 놓은 데이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요된 시간은 약 5시간. 모두 승인되자 4곳의 전산상 매출이 2백만 원 줄어들었다. 이제 5개 거래처의 잔고는 0원. 개별 거래처의 잔고도 0원이었다. 작업 완료였다.


이 과정을 일주일마다 반복했다. 물건을 아주 싸게 주고, 꼼수로 손해를 메웠다. C마트는 약속을 지켰다. 물건을 어마어마하게 주문해 줬다. 명절 영업이 끝나고 나는 매출 순위 8위에 이름을 올렸다. 피해를 본 사람은 없었다. 회사는 성과를 냈고, 거래처도 매출을 올렸다. 나도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회사에 몰입할수록 묘한 감정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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