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시'의 법치주의 원칙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19세기 중후반은 세계적인 격동의 시기였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국가가 생겨난 것뿐만 아니라, 런던, 상트페테르부르크, 뉴욕과 같은 도시들은 그 규모가 5배로 커지는 과정에 있었다. 석탄 및 철강 생산량이 급증하며 새로운 철도, 해군, 군대가 생겨나고, 열강 국가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을 군함과 맥심 기관총(Maxim gun)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던 극도로 폭력적인 시대였다.
후크 교수는 '법치주의'(rule of law)라는 이상이 이러한 전제적 국가 권력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아이러니하게 이 시기에 싹을 틔웠다고 말한다. 이 질문에 대해 영국의 법학자 '앨버트 벤 다이시'(Albert Venn Dicey, 1835-1922)는 영국 헌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초기 이론적 틀을 제시하며 현대적 법치주의 논의의 단초를 놓았다고 후크는 소개한다.
후크에 따르면, 다이시의 이론의 등장배경은 '자메이카 모란트 베이(Morant bay) 학살 사건'에 대하여 영국 총독의 기소를 위해 결성된 '자메이카 위원회'에 다이시가 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을 계기로 한다. 이 사건은 1865년 자메이카 흑인 농민들의 불평등과 빈곤에 항의하는 지역 봉기에 대하여 영국 식민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500여 명의 남성, 여성, 어린이를 총으로 쏴 죽이고, 일부는 즉결 처형한 만행이다. 다이시는 개인의 자유, 의회 중심의 입헌주의, 역사의 진보를 핵심 가치로 삼고 영국 법 제도를 인류 자유의 정점으로 보려는 낙관적이고 분석적인 사조인 '휘그파'의 지적 흐름과 복음주의 공리주의 등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다이시의 법치주의는 영국 헌법에 대한 새로운 분석적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 정립된 세 가지 핵심 원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첫째는, 처벌의 근거(처벌의 합법성)에 관한 것이다. 다이시는 사람이 처벌을 받거나 고통받는 상황은 법 위반 사실이 "일반 법원에서 통상적인 법적 방식"으로 입증되지 않는 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다이시가 지적한 사례는 대부분 왕실의 권한을 행사한 공무원에 관한 것으로, 법이 자의적이거나 예측 불가능한 국가 권력의 사용을 제어하는 방패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둘째는, 법적 평등에 관한 것이다. 그는 법치주의는 지위나 직책에 관계없이 그 누구도 법 위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며, 모든 사람은 '보통법'에 따라 '보통 재판소'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공무원에 대한 소송을 일반 법원에서 분리하여 다루는 프랑스의 행정법 체계를 '법적 평등'의 위반으로 규정하였는데, 공무원에 대한 소송을 전담하는 전문 법원은 공무원에게 편의를 제공할 것이라는 가정을 자신의 주장의 기반으로 삼은 것이다.
셋째는, 헌법 원칙의 사법적 기원에 관한 것이다. 다이시는 영국 헌법의 "일반 원칙"이 성문 헌법이 아닌 "판사가 만든 것"이며, 이는 사법부의 결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건을 일반화한 내용으로 구성된다고 설명했다. 다이시는 이렇게 판례를 통해 만들어진 헌법이 딱딱한 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진화적인 특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후크 교수가 지적과 같이, 다이시는 아무리 좋은 헌법상의 권리라도 그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피해자가 실제로 구제받을 수 있는 법적 수단(remedies)이 없다면 그 권리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현실적인 영국식 통찰을 강조했다.
다이시가 이 세 가지 원칙을 통해 궁극적으로 달성하고자 했던 것은 의회 주권(parliamentary sovereignty)과 법치주의라는 영국 입헌주의의 두 기둥을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후크 교수는 다이시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는데, 그는 "법의 우위는 의회의 주권 행사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즉, 법치주의가 입법 권력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정부의 행정권 남용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되며, 의회 주권과 법치주의의 상호 보완 작용은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과 유사한 제도적 권력 분립 형태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다이시의 법치주의는 당대의 비판과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여러 한계를 내포한다. 후크 교수는 다이시의 이론이 자칫 기득권과 권력에 봉사하는 법치주의로 변질될 위험이 있음을 신랄하게 지적한다. 후크 교수는 1867년 영국령 인도의 '살인적 분노 법' 사례를 든다. 이 법의 내용은 영국 관리에 대한 공격을 계획하거나 시도한 '광신도'(fanatics)로 분류된 특정 집단을 표적으로 삼아, 그들에게 정식 재판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재판장이 즉시 사형이나 시신 처리를 명령할 수 있도록 허용한 법이다. 후크는 이 법이 적절한 입법 절차를 거쳤다면 의회 우위 원칙에 따라 법원이 그 법의 효력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는 다이시 이론의 모순점을 지적한다. 즉, 의회가 특정 집단의 기본 권리를 빼앗는 아주 잔인하고 불평등한 법을 만들더라도, 다이시의 의회 주권 이론에 따르면, 법원조차도 이 법이 '나쁜 법'이라며 무효로 만들 수 없다는 결정적인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다이시의 주장의 대부분은 원칙적으로 합법성(legality)보다 법의 문자(letter of the law)가 승리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며, 후크 교수는 이러한 결론이 '보통의 법'과 '보통의 법원'의 양심, 국회의원의 도덕성에 법치주의의 성패가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고 비판한다. 또한, 헌법학자 '아이보 제닝스'(Ivor Jennings, 1903-65)와 같은 비평가는, 다이시의 연구를 초기 영국 복지 국가의 경제 개입에 대한 무의식적인 거부 반응이었다고 일축하며, 다이시가 "아동 노동, 대규모 공장 사고, 오염 등 이윤에 방해가 되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라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이는 다이시의 법치주의가 자유 시장이라는 기득권의 이익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이시의 법치주의가 현대 사회에 주는 가장 중요한 시사점은 국가 권력에 대한 감시와 시민 통제의 관점에서 재구성될 때 의미를 갖는다. 후크 교수는 다이시가 로크의 영향을 받아 국가의 자의적 또는 독재적 행동에 날카로운 초점을 맞추었으며, 법치주의가 공무원의 권력 남용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고 강조한다. 다이시는 폭동이나 침략 시에도 '개인의 자유'와 '공적 집회'의 권리가 지속된다고 역설했으며, 후크 교수는 이러한 통찰이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 ICCPR)의 원칙을 예견하며 국가의 강압적인 힘에 대항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19세기 당시 산업화 시대의 물리적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는 국가 행정의 대상과 형태로부터, 현대의 법치주의 및 규제 담론은 다이시가 예상하지 못한 정보화 시대의 비물리적 권력 및 시장 규율로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즉, 국가 행정의 대상과 형태가 복잡하고 기술적인 행정 기능으로 다변화되면서 다이시의 낡은 법치주의 원칙은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따라서 법치주의는 단순히 법이 존재하는 상태를 넘어, 사법부와 입법부가 상호 견제하며 행정 권력의 비대화와 자의적 행사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개인의 권리 침해에 대한 실질적인 구제(remedy)를 보장하는 시민 통제의 메커니즘으로 기능해야 함을 시사한다. 현대의 법치주의는 공적 권력의 모든 형태—심지어 선한 목적을 가진 규제일지라도—가 법의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통제 아래 놓여야 한다는 영구적인 과제를 안고 있다.
결국, 폭력의 시대에 싹튼 다이시의 이론은 법치주의라는 교향곡의 시작을 알리는 첫 코드였으며, 그 유산은 국가의 권력 행사 전반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투명성 요구라는 현대적 의미로 계승되어 새롭게 계속 변주되어야 한다는 시사점을 지금의 우리에게 가져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