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라는 허무 속에서, 회사원의 '실존적' 절규

인간의 존재의 이유를 찾아서...

by 날개

오늘날의 회사는 더 이상 '생산'의 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의미를 가장한 허무의 체계이며, 질서의 형식을 취한 무질서의 세계이다. 매일같이 수시로 열리는 회의는 핵심 주위를 빙빙 돌고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다음 회의를 예고한다. 보고서는 문장으로 포장된 책임 회피의 교묘한 증거물로 남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이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니와, 묻는 순간 체계의 눈밖에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계적으로 매일 출근하여 “회사 놀이”를 계속한다. 부서라는 이름의 작은 봉토에서 직급과 직책이라는 권력을 흉내 내며, 화면과 키보드 안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붙잡는다.


이 구조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일찍이 예견했다. 그는 인간이 타성에 길들여질 때, “자신의 사슬을 편안한 침대처럼 느낀다.”라고 했다. 회사는 바로 그 편안한 침대이다. 사람들은 관료적 절차 속에 안주하며, 사고의 불편함을 조직의 규칙으로 대체하고 회피한다. 그 결과 회사는 더 이상 외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유기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지탱하기 위해 작동하는 폐쇄적 장치가 된다. 효율과 합리성은 구호일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케케묵은 관성의 포장술이다.


관료제는 명령과 복종의 기계적 교환 위에 세워져 있다.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절차의 정당화다. 한 번 승인된 문서는 내용보다 결재의 유무로 의미를 얻고, 한 번 회람된 의견은 논리보다 부여된 직책의 높이로 결정된다. 말이 사고를 대체하고, 복종이 판단을 대신한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보다 순응하거나 모른 척하기를 택하고, 책임지기보다 보고하기거나 회피하기를 택한다. 이렇게 형식이 내용을 압도할 때, 회사는 합리적 구조를 가장한 거대한 비자발적 광기의 도가니로 변한다. 그곳에서 일하는 개인은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언제나 대체가능한 소모품이다.


이 세계는 도덕도 염치도 생존하지 못하는 환경이다. 무능은 인맥으로 미화되고, 무식은 자신감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아부는 커뮤니케이션으로, 회피는 유연함으로, 무책임은 권위로 변환된다. 반면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적 인물’로 분류된다. 그는 불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불편한 진실을 지적하며, 체계의 부조리를 가시화시킨다. 그래서 그는 결국 조직의 건강을 해치는 존재로 낙인찍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사라진 자리를 메우는 것은 더 큰 '무사유'다. 회사는 이렇게 멍청한 아첨꾼들을 좋아한다. 생각하지 않기에 잘 적응하고, 염치가 없기에 오래 남는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전체주의의 뿌리를 “사유의 부재"(thoughtlessness)에서 찾았다. 그것은 악의 의도보다 더 근원적인 공허, 즉 ‘아무 생각 없음’이다. 회사의 부조리 역시 이 무사유의 결과다.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모두가 절차대로 움직이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악은 개인의 악의가 아니라 시스템의 관성 속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개인은 점차 도덕적 감각을 잃는다. 그는 단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그러니까 인간이 아닌 노예가 된다.


이런 구조는 점점 정치화된다. 실력보다 자리, 논리보다 세력, 사실보다 서열이 우선한다. 작은 권력을 쥔 자들은 그 권력의 크기만큼 비열해지고, 높은 자리에 앉은 자일수록 더 불안하기에 더욱 아첨한다. 서로의 생존이 타인의 몰락에 의존하는 제로섬의 생태 속에서, 인간적 관계는 철저히 거래로 환원된다. 이른바 ‘회사 정치’란 결국, 생존을 가장한 착취의 언어다. 여기서 염치는 결함이고, 진실은 위험이며, 양심은 무능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렇게 조직은 도덕적 폐허 위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떠나지 못한다. 아니, 떠나지 않는다. 그들은 체계 속에서만 자신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승진과 연봉, 직함과 평가라는 지표가 사라지는 순간, 자신의 존재 이유도 함께 사라진다. 이것이 현대의 허무다. 그 허무는 개인의 내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조직이라는 외부 시스템이 개인의 존재 근거를 통째로 점유했을 때 발생하는 감각이다. 회사는 사람에게 돈을 주는 곳이 아니라, 존재를 인질로 잡는 곳이다.


따라서 문제는 ‘일의 의미’가 아니라, ‘존재의 주권’을 되찾는 일이다. 허무의 반대는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자각이다. 조직의 허위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나 자신의 경계를 설정하는 일. 생각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체계 속에서도 사고를 유지하는 일. 그것이 유일한 저항이며, 남은 인간성의 형태다. 회사라는 거대한 허무의 장치 속에서도, 우리가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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