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의존성 관리와 국내 생태계 공정성 확보 전략
반도체(semiconductor)는 현대 사회의 기능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자동차, 컴퓨터, 스마트폰과 같은 소비재는 물론, 통신 및 운송 장비, 항법 기구, 심지어는 소프트웨어 및 과학 연구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가치 사슬의 모든 단계에서 중간 투입재로서 사용된다. 이처럼 수요가 편재한(ubiquitous) 것과 대조적으로, 반도체 생산은 소수의 국가에 고도로 집중되어 있다. 2021년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와 미-중 간의 지정학적 갈등 심화는 반도체 공급망의 취약성을 전 세계적으로 부각시켰으며, 각국 정부는 기술 주권(technological sovereignty) 확보와 자국의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산업 개입을 가속화하는 실정이다.
유럽의 '이포 경제연구소'(ifo Institute)의 연구자 Dorothee Hillrichs와 Anita Wölfl이 2025년 2월에 발표한 보고서인 "글로벌 반도체 가치 사슬의 복잡성과 의존성"(Complexities and Dependencies in the Global Semiconductor Value Chain, EconPol Policy Report 54)에서는 이러한 복잡한 글로벌 반도체 경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제공한다. 이 보고서에서는 반도체 생산이 설계(design), 제조(manufacturing), 조립, 테스트 및 패키징(ATP)의 세 가지 큰 단계로 분리되며, 각 단계가 고유한 장비, 소재, 서비스 투입에 의존하는 복잡한 가치 사슬로 엮여 있음을 자세히 보여준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으로 70여 개국이 1조 2천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관련 무역에 참여하고 있지만, 실제 무역은 소수 국가에 극도로 집중되어 있다. 최종 칩(chip) 수출은 대만, 중국, 한국의 3개국이 약 50%를 차지하며 주도하고 있는 반면, 장비 및 소재 등 상류(upstream) 공급망에서는 미국, 일본, 독일, 네덜란드가 순수출국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보고서는 이러한 글로벌 분업화와 지리적 집중으로 인해 다자간 상호 의존성(multilateral dependencies)이 발생함을 명확히 보여준다. 최종 칩 수출을 주도하는 한국, 대만, 중국 3국은 네덜란드, 일본, 미국에 대해 무역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고도로 정교한 장비와 소재를 해당 국가들로부터 수입해야 함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로, 네덜란드는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와 같은 핵심 장비 수출을 통해 막대한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일본 역시 주요 수출국 각각에 대해 무역 흑자를 나타내는 등 상류시장의 강국들이 최종 칩 제조 강국들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이들의 분석은 반도체 가치 사슬이 단순히 최종 칩 생산에 국한되지 않고, 핵심 장비 및 소재 부문에서도 소수 국가에 대한 매우 높은 의존성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복잡하고 상호 의존적인 글로벌 반도체 가치 사슬의 특성 때문에 보고서는 정책 입안자들에게 미묘하고 정교한(nuanced) 정책 접근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특히 유럽 당국에 대한 시사점은, 아시아 지역의 제조 집중과 그로 인한 지정학적 리스크를 완화하기 위해 단순한 칩 제조 시설 유치를 넘어, 유럽이 강점을 가진 장비 및 소재 부문 투자를 강화하고, 동시에 글로벌 협력을 통해 공급망의 탄력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유럽 당국은 '어떻게 하면 아시아 제조 의존도를 낮출까'를 핵심 질문으로 삼고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이는 유럽이 반도체의 주요 수요처이자, 장비 및 소재 공급의 중요한 플레이어라는 자국의 위치를 반영한 전략적 선택이다.
유럽 당국에 대한 이러한 시사점을 우리나라의 산업경쟁 당국에 주는 시사점으로 전환하면, 그 정책적 초점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자 첨단 파운드리 기술을 보유한 제조 강국이며, 동시에 핵심 장비 및 소재를 대규모로 수입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산업경쟁 당국의 핵심 질문은 '어떻게 하면 제조 강국의 지위를 굳건히 지키면서도, 핵심 장비·소재 의존도 및 지정학적 리스크를 안정적으로 관리하여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 우위를 지속할까'가 되어야 한다.
먼저, 보고서에서 지적한 '다자간 상호 의존성'의 관리 차원에서, 우리 당국은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구도 속에서 주도적인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미국, 유럽연합 등 주요국들이 자국 우선주의 정책과 대규모 보조금 지급을 통해 공급망 재편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이 불필요한 규제나 역차별을 받지 않도록 국제적인 협상력을 극대화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기술 보호를 넘어, 우리의 핵심 제조 기술이 국제 표준 설정이나 다자간 협의체(예컨대, CHIP 4 동맹) 논의에서 '지정학적 자산'(geopolitical asset)으로 인정받도록 외교적 노력을 병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산업 경쟁 당국은 이러한 국제적 움직임을 면밀히 분석하고, 자국의 산업 보호와 글로벌 경쟁 촉진이라는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나아가, 반도체 무역의 높은 집중도는 기술, 숙련 노동, 자본의 비교 우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 당국은 미래 기술에 대한 선제적인 투자와 핵심 인력 양성에 경쟁 정책적 관점을 결합해야 한다. 시장은 규모의 경제와 혁신에 의해 움직이므로, 단순한 보조금 지급을 넘어선 혁신을 저해하는 규제 요소를 제거하고, 차세대 반도체(예컨대, AI 칩, 첨단 패키징) 분야에서 공정 경쟁의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국가 핵심 기술의 해외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경쟁 당국의 기업결합 심사 등 관련 규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국내 기업 간의 자발적인 기술 공동 개발 및 표준화를 위한 협력 행위는 장려하는 등 복합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아울러, 보고서가 강조한 반도체 가치 사슬의 '복잡성'에 대한 대응으로서, 우리 경쟁 당국은 수직적 분업 구조 내의 공정한 경쟁 질서를 확립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반도체 생산은 고비용의 특성상 제조 단계에서 규모의 경제가 필수적이며, 이로 인해 시장은 파운드리나 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과 같은 소수 대기업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수직적 지배력은 중소 팹리스(설계 전문 기업), 설계자산(IP) 제공업체, 장비·소재 국산화 기업들과의 거래 관계에서 남용될 위험이 크다. 경쟁 당국은 국내 대형 제조사들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거래 상대방에게 부당한 단가나 조건을 강요하거나, 기술 정보 등을 탈취하여 이들 중소기업이 속한 수평적 경쟁 시장의 건전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엄격하게 감시하고 규제해야 한다. 이는 국내 반도체 생태계의 혁신 허리 부분을 두껍게 만드는 핵심 조치이며, 궁극적으로 특정 단계의 해외 의존도를 낮추고 산업 경쟁력 다각화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Hillrichs와 Wölfl의 보고서가 유럽에 아시아 제조 의존도 완화라는 시사점을 던졌다면, 한국의 산업경쟁 당국에는 제조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취약한 상류시장 의존성 및 지정학적 리스크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라는 정책적 과제를 제시한다. 이는 국내외 경쟁 환경의 복잡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공정 경쟁의 수호자로서 국내 생태계의 내실을 다지며, 글로벌 협력의 조정자로서 지정학적 변동성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정교하고 다층적인 정책 프레임워크를 구축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한국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가치 사슬에서 지속 가능한 리더십을 확보해 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