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전염병

근주자적을 향한 자기 보존의 '빈집'

by 날개

인간은 어떤 누구와 같이 시간을 보내면 부지불식간에 전염되는 게 맞는 것 같다. 말투 혹은 행동이나 태도, 표정 심지어 사소한 습관, 나아가 생각과 가치관까지도. 특히, 욕이나 폭력적인 언어는 더 쉽게 따라 하게 되기 쉽고, 그런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오래 있다가는, 반복되는 음주 행위, 비난과 냉소가 일상화되고, 폭력에 대한 감각이 더 무뎌지기 마련이다. 단언컨대, 나쁜 것은 더 전염성이 크다. 즉, ‘근묵자흑(近墨者黑)’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타인과 교감하게 되는데, 무의식적으로 본의 아니게 그들의 언어, 감정, 기운, 습관을 흡수하게 된다. 심리학에서 이를 '정서적 감염'(emotional contagion)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일레인 해트필드'(Elaine Hatfield, 1937–)는 인간이 타인의 표정과 말투, 심지어 호흡의 리듬까지 모방하며 감정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뇌과학에서는 이런 현상이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s)의 작용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볼 때, 마치 내가 직접 그 행동을 하는 것처럼 뇌가 반응한다는 것이다. 철학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존재는 ‘관계성’ 속에서만 완성되는데, 우리는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그 관계의 맥락 안에서만 ‘나’를 규정하게 된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가 말한 ‘아비투스'(habitus) 개념 역시 이런 전염의 구조를 설명한다. 특정한 환경 속에서 반복적으로 형성된 행동과 인식의 습관은, 개인의 의식적 선택을 넘어 무의식의 수준에서 닮아가게 된다.


이 전염은 언어를 통해 가장 빠르고 강력하게 퍼지게 되는데, 언어는 사고의 틀을 규정하고 사고는 곧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는 우리의 인식 가능성을 규정하며, 그 단어들이 부정적이고 폭력적일수록 우리의 세계도 그러한 형태로 굳어진다. 거친 말이 난무하는 집단에서는 사고의 뉘앙스가 단순화되고, 섬세한 감정이 사라진다. 언어의 부패는 인간의 감수성 자체를 마비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무심히 던진 말들 속에서도 이미 타인에게 감정적 흔적을 남기고, 그들이 다시 나를 닮게 만든다.


그러나, '근묵자흑'만 있는 게 아니다. '근주자적'(近朱者赤)도 있다. 좋은 환경이나 사람과 가까이하면 자신도 모르게 좋은 영향을 받게 된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인간은 서로의 가능성이 되어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타인을 통해 타락할 수도 있지만, 타인을 통해 구원받을 수도 있다. 진정으로 선한 사람, 고요한 사람, 진심으로 말하는 사람의 곁에 있을 때 우리의 언어와 표정, 사고의 결은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선의도, 공감도, 성실함도 일정한 밀도로 아주 조금씩 퍼져 나간다. 단지 그것은 자극적이지 않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것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과시하거나 의도하게 될 경우, 그것은 상당한 거부감과 심지어는 역겨움까지 유발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꾸준한 행동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전달될 때 진정한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은 자신이 선하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는다. 자신이 지금 '선한 일을 하고 있다'는 '전시'없이, 그냥 당연한 일상처럼 행해질 때가 가장 자연스럽다. 이런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러운 선행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담 없이 스며들어 진정한 '전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빛을 전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타올라야 한다.”라고 말했지만, 타오름이 자기 파괴로 이어질 때 그 불은 금세 사그라든다. 선의의 전염은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 보존 속에서 가능하다. 세상의 어둠에 맞서는 일은 거창한 설득보다,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버티는 '고요함'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인 기형도(奇亨度, 1960–1989)의 '빈집'이라는 시에서, 전염성이 강한 사람에 대한 중독을 뒤로하고, 고요한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일단 다시 돌아가기 위해 문을 잠시 잠근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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