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안아주는 것들
살다 보면 위로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어쩌면 그 순간이 매일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겐 아주 드물게 있을 수도 있다. 나의 경우 매일 그랬다. 매일 위로가 필요했다. 내게 위로가 되는 것은 '괜찮다' 혹은 '다 잘될 거야' 같은 말이 아니었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나에게 그런 말은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켰다. 가장 힘들 때 나에게 위로가 되어준 건 '음악' 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안에 있는 노랫말이었다.
내게 위로가 되는 것들
내 플레이 리스트에 있는 노래들은 대부분 잔잔한 것들 혹은 발라드다. 비트가 빠른 신나는 음악보다는 나의 심장박동 수와 템포가 비슷한 혹은 그것보다 느린 노래들이 나에게는 맞는다. 이런 노래들은 들으면서 나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준다. 내가 듣는 음악들에는 다 나의 사연이 담겨 있다. 어떤 음악들은 지금도 '그때의 나' 를 떠올리게 한다. ' 이 노래를 들을 당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 , ' 그때 나는 이런 상황이었지...' 과거의 감정들이 아주 생생히 기억난다. 음악이 매개체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그냥 잊혔을 기억들일 텐데 말이다.
음악 말고 또 하나 위로가 되는 것을 꼽자면 그건 '드라마' 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위로를 받는다. 드라마가 나에게 그런 역할을 했다. 때로는 희망과 용기를 얻기도 했고 때로는 나에게는 없는 감성을 주기도 했다. 드라마 속 감정들이 좋았다. 어릴 때는 엄마한테 한 드라마를 재탕 삼탕을 한다고 구박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어쩌나 난 그래도 좋은 걸. 나한테 드라마는 단순히 소비성 콘텐츠가 아니었다. 세상이 들려주는 사람 사는 이야기였다. 내가 너의 힘듦을 안다고. 그래도 다시 한번 힘내서 살아보라고 토닥여 주는 것 같았다.
사람에게는 위로받으려고 하지 말기
살면서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 한 가지쯤은 필요하다. 그게 뭐라도 좋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 '사람' 이 그 대상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사람한테 받는 위로가 그 어느 것보다 따뜻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람한테는 위로와 동시에 상처도 같이 받는다. 지금껏 생각해보면 아무리 친하고 아무리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나에게 상처가 되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있었다.
사람에게 위로를 받으려고 할수록 그 사람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커진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욕심이 생긴다. 내가 마음을 준만큼 그 사람도 나에게 마음을 주길 바란다. 어릴 때 나는 베프라고 생각했는데 상대 친구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큰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감정에 ' 배신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굳이 이렇게 상처를 하나 더 늘릴 필요는 없다. 예전에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이 가족보다 애완견에게 그토록 애정을 쏟는 이유는 강아지와 고양이는 절대 자신을 배신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토록 배신감이란 감정을 두려워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 말고 나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찾아보자. 다른 이 에게는 하찮은 것이라도 좋다. 덕질이라도 좋고 (덕질은 일방적인 관계라 상처받을 일이 거의 없다..) 영화라도 좋고 여행이라도 좋다. 이것들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힘을 준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삶의 크고 작은 고비들을 넘기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