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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May 15. 2022

동행

- 초등시절 스승님과의 짧은 여행

새벽같이 일어난 아내가, 내가 가져갈 여름옷이며, 몇 개 반찬거리 싸놓고, 옷도 다림질한 후에야,  

‘이제 그만 일어 나이소’하는 소리에 잠을 깨었지요.     


어제 늦은 밤, 서울에서 대구까지 먼 길을 달려온 탓인지, 눈은 퉁퉁 부어있고 몸은 천근만근이고, 조금 더 늦게 선생님 모시러 간다고 할 걸 하는 간사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고, 좀 늦어도, 가면서 선생님께 전화 올리면 되겠다 싶은 버릇없는 생각을 하면서 좀 더 잠자리에서 미적거렸습니다.

대구에 살고 있는 친구들 중에 누가 오늘 선생님을 안동까지 모시고 가면 좋을 텐데, 굳이 서울과 대구를 주말부부로 허덕이는 나를, 반장이었다는 이유로 선생님 모시는 일을 짐 지운 친구들을 잠시 원망했습니다.  

  

서둘러도 한 십 분은 늦겠다 싶었는데, 고맙게도 나의 ‘네비 아가씨’는 정확히 2분 전에 선생님께서 사시는 아파트까지 나를 이끌었습니다. 두리번두리번 일러주신 아파트 동을 찾으려는데, 벌써 선생님이 나오셔서 오히려 나를 찾고 계셨습니다. 40년간 몸에 배이신 직업상의 이유보다는, 매사에 철두철미하신 성품이시겠지요.     

뒤에서 ‘선생님’ 부르시니, 돌아서시는 순간, 편찮으시다더니 몇 년 전에 뵐 때 보다, 많이 수척해진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많이 편찮으신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희들이 무리하게 모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아. 제자들 보러 가야지. 혹시 내가 이 병마를 이기지 못한다면, 기회가 잘 없을 것 

 같아 가는 거야.‘     

말씀을 듣는 순간 가슴이 찡하고, 가슴속에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습니다.     


가시는 내내, 살아오신 날들을 말씀하셨지요.

우리들을 졸업시키고, 우리의 초등학교에 일 년 더 계시다가, 인근의 초등학교로 옮기시고는 대구로 전근을 가셨다고 하셨습니다. 마흔이 되시던 해, 영문학과에 새로 편입학하여 공부를 하셨다는 말씀과, 원래 출중한 영어실력에, 일본어도 하시고, 쿠웨이트에 한국대사관 학교에 교장으로 칠 년 동안이나 계셨던 인연으로 아랍어도 하신다는 말씀에, 삶에 겨워 허덕거리며,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은 생활을 일상으로 하는 나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아랍어의 ‘kh(ㅋ)'발음을 완벽하게 하시고자, 대학도서관에 일주일 동안 지내시며, 남녀 대학생에게 묻고 또 묻고, 발음을 시켜보고, 듣고 또 듣고 하여, 그것이 우리말 ‘크’가 아닌 목구멍 속에서 나오는 ‘크’라는 것을 터득하셨다는 탐구열.     


그러시면서, 한글 학자들이 없애버린 한글의 4개 자, 모음을 못내 아쉬워하셨습니다. 그것을 없앰으로써 우리 국민이 영어도 잘 못하고 외국어 발음도 힘들게 되었노라시며, 우리 민족은 엄청난 문화적 손실을 입었다고 한탄하셨습니다.     


8월에 은퇴하시면, 중국에 육 개월, 일본에 육 개월 정도 어학연수 가려고 계획했는데, 갑자기 찾아온 병으로 갈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실 땐 왠지 쓸쓸해 보이셨지요.     

그 정도로 치열하게 인생을 사셨고, 사회적 위치를 이루셨으면, 나의 기준으로는 여행이나, 좀 다니고, 이제 좀 쉴 거야 하겠는데, 끝없는 탐구열과 학문에의 열정은 도무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승은 영원히 우리의 스승이 되어 제자들의 삶의 표본이 되고, 무언으로 평생에 걸쳐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는가 봅니다.     



안동 가까이 다다르자 추억을 말씀하십니다.

여름날이면 낙동강 부근에서 물고기 잡으신 추억. 한겨울에 동료 선생님들과 무릉까지 자전거로 스케이트 타러 오신 추억.  

일부러 새로 난 널찍한 길로 가지 않고, 구불구불한 옛날 대구-안동 국도로 운전대를 틀었습니다.


‘아 맞아, 여기서 고기를 잡았지, 이 강 모퉁이 돌면 어디에 절벽이 있었는데.’     

연신 추억을 떠 올리시는 듯하셨습니다.     

‘OO초등학교에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오늘 거기서 행사하는 것 아니가?’      

지금은 시청이 자리 잡고 있는, 옛날의 교대 자리 지나서, 삼태사묘 앞을 거쳐, 도립병원 앞을 지났습니다.        

‘여기가 OOO 이가 살던 동네입니다’

‘아! 맞아. 그때도 저 교회가 있었지.’      

여기에는 누가 살았고, 신사(神社) 계단 옆에는 누가 살았고,... 

삼십여 년의 세월도 스승의 기억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학교 정문에서 똑바로 보이던, 커다란 회나무가 있던 좁은 골목길로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신혼 때 세들어 사시던 어느 한옥 부근이었습니다.


   - 아! 나는 다시 36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선생님 댁에 점심 도시락 가지러 가던 그때의 소년이 되어 골목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집사람과 와서 자전거로 천천히 다시 한번 봐야겠다.’     

연신 한탄을 금치 못 하시던 선생님은 젊은 시절의 흔적이 있는 자리가 못내 아쉬우신지, 스스로 다음을 기약하십니다.


학교에 들어가서 운동장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보았지요.     

‘저 느티나무가 많이 컸구나. 저 세면대는 아직 그대로 있네.’     

양호 검사 때면 양치 상태가 불량한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킬킬대며 양치질하던,  앞뒤 교사 사이에 있던 세면대를 보시며, 기억 저편을 더듬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사 학년 때쯤, 동물원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우리들을 위해, 선생님들께서 목수가 되고, 미장이가 되어 손수 만드셨던 사자, 기린, 호랑이 등. 우리가 파노라마라고 부르던 그 신비롭던 형상들은 이제는 흔적도 없고, 정문 오른편의 첨성대만이 색 바랜 세월을 지키고 있었지요.     


그해 초여름, 이맘때쯤이었을 겁니다. 선도부장의 역할을 맡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느 생각 없는 택시 한 대가 학교로 들어왔다가, 운동장 정면으로 난 계단 문으로 돌진하여 내려갔지요.     

와당탕!

택시는 계단 아래 조그만 문방구를 들이받고 멈추어 섰고, 놀라서 달려오신 선생님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나의 볼을 사정없이 후려치셨지요. 지금도 불같은 성품이신데, 혈기왕성한 젊은 시절은 오죽하셨을까요?


선생님께서도 그것을 기억하시고 계셨지만, 

학교 앞 문방구는 폐교 운운까지 나올 정도로 줄어버린 아이들 때문인지, 

낡은 합판 조각으로 간신히 도로와 경계하며. 침묵 속에 잠겨있었습니다.    


아.! 그런 것이었습니다.

‘스티브 호킹’도 풀지 못할 시공간을 넘고 넘어, 잠시 다른 차원 속으로 여행한 짧은 동행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날의 긴 시간을 짧게 요약하며 추억여행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삶이란 망각도 필요하고, 추억도 필요한 가 봅니다.

공상 속의 타임머신이란 흘러간 시간을 추억으로 반추한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점심식사 후 선생님을 터미널까지 모셔준다는 핑계로 찬구들에게 인사도 없이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댁까지 다시 모셨으면 내 맘이 편했을 텐데, 

기어이 터미널 안까지도 들어오지 못하게 제자를 밀어내는 선생님을 길에서 꾸벅 인사드리고 

돌아서는 마음은 편치는 않았지만, 

휴일임에도 다시 서울 사무실에 가봐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였습니다.     


서울에 도착하여 비가 몰아치는 가운데, 꽉 막힌 도로 한가운데서 안부를 드렸습니다.

받지 않은 전화에, 많이 피곤하시어 주무시는가 보다 하는데 잠시 후 벨이 울렸습니다.     


‘편히 가셨습니까?’

‘응. 이 정도는 괜찮아. 책 보느라 휴대폰이 멀리 있어서, 전화소리 못 들었네. 미안하네.’     


아! 우리 선생님.

지나간 먼 시간들을 짧은 시간으로 압축한 여정의 피로 속에서도 또 독서라니요.     


어린 소년들이, 이제 중년의 사내들이 되어버린 지금도,

‘제자, 스승에게 길을 묻지 않을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2008.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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