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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自傳

by 동틀무렵

-아버지 생전에 쓴 글을 어버이날에 다시 꺼내어 봅니다-


(이번 추석에 가니 아버지께서 미소를 지으시며 내게 잡지 하나를 건네주셨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나의 상념은 하나의 단어로 귀결된다. 옛 어른들이 항용(恒用) 그렇듯이 마음으로는 자정(慈情)이 넘치셔도 겉으로는 좀처럼 그 사랑을 드러내지 아니하셨으니, 지금도 기억이 가물가물 피어나는 대여섯 살의 어린 시절조차 한 번도 아버지 품에 안기거나 업혀 본 기억도 없고, 동네 앞 구멍가게에 쪼르르 달려가 비스킷 한 조각 집어 들고 앞니로 조금씩 베어 먹어가며 동네 아이들에게 우쭐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졸라본 적도 없다. 겨울이면 신작로 모퉁이 포장마차에서 파는, 동전 한 닢에 두 개씩 주던 ‘국화만두’를 양손에 들고 찰나의 어린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푼돈을 졸라 본 기억도 없다.


내가 알아서 공부며 앞가림을 하였다면 웃을 일이지만, 별로 야단이나 채근을 받아본 기억도 없이, 아버지는 늘 애틋한 눈길을 주시며 지금까지도 나를 바라만 보고 계신다.


아버지는 나의 첫 선생이기도 하셨다. 늘 바깥에서 험한 일을 하신 아버지의 직업상 이유로, 비가 오는 날은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날이었다. 그런 날이면, 나를 불러 앉혀놓고 학교에 들어가면 배우게 될 것에 대해서, 마치 그것 또한 당신의 의무인양 공부를 가르치시곤 하셨다. 글자를 깨우치고 더하기 빼기와 구구단과 곱셈 나눗셈을 익혔고, 그림 그리듯이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내 이름을 한문으로 쓰기도 했다. 밀가루나 시멘트부대의 포장 종이인 질기고 누런 ‘돗가루 부대 종이’를 알맞게 잘라 이불 홑청을 시침질할 때 쓰는 굵은 무명실로, 마치 옛날 책 엮듯이 엮어 놓은 것이 나의 공책이었으며 그 종이의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버지와 같이 시간을 보낸 유일한 놀이였을 것이다.


그 어느 날의 아버지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어린 내가 풀기에는 좀 과하다 싶은 산수 문제로 바닥에 엎디어 끙끙대며 아버지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을 때, 아버지께서 응시하던 그때 그 눈동자는 아직도 내 기억에서 또렷하다. 방문을 가만히 응시하시며 한 점 미동도 없었다. 너무나 고요하여, 어린 나는 세상에 갑자기 혼자가 된 듯, 까닭을 알 수 없는 너무나 깊은 걱정과 적막감에 휩싸여 버렸다. 순식간에 무슨 큰 걱정덩어리가 가슴을 짓누르듯, 가슴이 두근거리고 귀에서는 쿵덕쿵덕하는 펌프질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어린 자식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까 하는 걱정이셨을까. 아니면 지금 내리는 비가 여름날 엿가락처럼 늘어져 며칠을 일 나가지 못할 것을 염려하셨을까.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때 아버지께서 방문을 하염없이 응시하시던 눈동자와 그 눈동자에 어리던 窓戶의 격자무늬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나름대로 머리가 굵어지고, 세월과 함께 덤으로 붙어오는 ‘철’이라는 것이 들어가면서, 아버지를 회피하였고 대화는 점점 엷어졌으며 마주 뵙는 것조차 피하였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의무처럼 하던 가정조사서의 빈칸을 메울 때라던가, 아버지 직업을 밝혀야 할 때의 잠깐의 머뭇거림에 대한 원망도 아니었고, 선생님들께서 라디오 있는 사람 손들어, 뭐 있는 사람 손들어, 하면서 ‘잔인한 호구조사’를 할 때 한 번도 손들 일이 없을 만큼, 부유하지 못한 것이 원망스러워서도 아니었다.


내가 사는 동네는 내남없이 그런 사치는 드물었고, 봄철이면 동네 어머니들이 조금이라도 양식을 불리기 위해, 지천에서 뜯어와서 공동우물에서 씻은 쑥이며 봄나물들이 뱉어 놓은 구정물들이 좁다란 골목길을 가로지르는 시커먼 도랑물을 희부옇게 만들었어도, 우리 집은 한 번도 따스한 밥을 건너뛰어 본 적이 없다.


막연히 아버지를 피하였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겹쳐오는 반항의 심리이기도 하였고, 첫 선생보다도 더 알량하게 몇 개의 단어와 조금의 지식(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는)이 차올라서 이제는 홀로서기도 가능하다는 겁 없는 건방이기도 하였고, 그러한 이유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무례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 객지에 떨어져 살면서, 때맞추어 날아오는 생활비며 학비를 볼 때마다 늦은 밤이면 아버지를 되돌아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난생처음 겪는 어떤 경험을 계기로 쓰게 된 일기장에 그날의 상념을 풀어헤쳐 놓다가, 어느 날 문득 아버지에 대한 나의 감정이 사춘기 시절의 그런 참람(僭濫)한 감정이 아님을 알았다.


‘연민’이었다. 오로지 연민이었다. 휴식의 주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계절의 요동에도 변함없이 날마다 바깥일 하시며 단 한 번도 한탄하시거나 식구들에게 힘든 내색을 하신 적도 없으셨고, 철없는 자식들에게 매 한번 들지 않았던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지킴이, 오히려 나에게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어서 스스로 괴로웠는지 모른다. 한 번도 기대를 말씀하시지 않고 그윽한 눈으로 자식을 바라보신 그 눈길에, 내색하지 않으신 아버지의 ‘그 어떤 기대’를 충족시켜 드리지 못한 그때나 지금의 나의 현실이 괴로웠으리라.


당신이라고 하시고 싶으셨던 것이 왜 없었으리오? 세상의 뭇사람들이 즐기는 잡다한 오락이나 유흥이 있으나, 그런 것들은 仙界에서 下界의 일로 내려다보듯 하시는 힘겨운 버팀과 無言의 바라봄을, 어려워해서 피하였고 부담스러워서 숨었으며 안타까워서 외면한 결과는 수년 동안을 내 안으로, 안으로 침잠하여 연민의 감정으로 차곡차곡 쌓였음을 알았다.


아버지의 사회적 신분에 대한 막연한 열등감은, 그 시절에 본 어느 만화의 주인공처럼 ‘우리 아버지는 대한민국 제일의 막노동꾼입니다.’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지만, 내가 결론 내린 ‘연민’이라는 감정은 빗물처럼 마음의 가장 낮은 자리에 고여 평생에 걸쳐 나를 짓누를 것이다.


내 고향 어느 鄕土紙의 기자가 아버지처럼 이름 없는 뭇사람들의 生을 구술시켜 글로 치환하여 매달 책에 싣는 모양인데, 이번 추석에 가니 아버지께서 웃으시며 거기에 당신이 있다고 얇은 책 하나를 건네주셨다.

소일 삼아 다니시던 향토의 어느 공원에서, 그달의 지면을 채우려는 글쟁이의 집요한 설득과 수고 덕분으로, 저세상으로 돌아가시면 묘소 앞 床石에 ‘處士 OO O公 諱OO’으로 이름 한 줄 남기실, 뭇사람인 아버지의 삶이 몇 페이지의 글과 사진으로 차지하고 있었다. 가슴을 차지하고 있는 연민이 피어올라 대충 읽고 실없는 말을 드리고는 날마다 허허로운 내 자리에 돌아와 그 글을 구해서 찬찬히 다시 읽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드문드문 들었던 당신의 삶을 궤적. 일곱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내 祖父)를 여의고 배움이라고는 종조부 아래서 옛글이나마 터득하시고, 농사와 집안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감당하려 하셨던 아버지. 찬란한 것도 없고 빛났던 시절도 없이, 징용과 전쟁이 이어진 격동의 시절은 험난하고 至難한 시간으로 아버지의 삶을 채웠고, 어쩔 수 없이 놓치셨던 인생의 한두 번의 기회와 또 다른 길에의 선택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이 가득한 아버지의 自傳이었다. 메마른 허허벌판에 돋은 잡초들처럼 듬성듬성하게 압축과 요약이 반복된 自傳이었다. 왜 그리하셨을까, 왜 그리 사셨을까 하는 아쉬움과 연민이 다시 나의 가슴을 가득 채운다.

이제는 무거운 것을 다 벗어던지시고, 오로지 자식 잘되기만 바라시는 늙으신 아버지. 먼 훗날조차 자식이 당신 모시기에 힘들까 하시며 입버릇처럼 한 줌 재로 돌아가시기를 말씀하시지만, 나도 봄가을 때맞추어 아버지 누워 계신 곳으로 달려가, 기쁜 일 좋은 일을 말씀드리고 슬프고 괴로운 일은 의지하고 싶으니, 언젠가는 될 그 훗날에 평생을 저지르고 있는 불효에 또 하나의 불효를 더 하는 한이 되더라도, 양지바른 산비탈에서나마 아버지의 목소리를 세상 다하는 날까지 들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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