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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봄

by 동틀무렵

수시로 다니던 성북천 산책길에서 그동안에는 눈에 띄지 않던 글 하나가 오늘에야 보인다. 타일 조각에 쓰여 있는 정갈한 글*이었다. 4·19혁명 때 목숨을 잃은, 당시 한성여중 2학년이었던 ‘진영숙 열사’가 어머니께 보낸 편지글이다. 만 14세도 안 된 어린 여학생이 어떻게 저런 의식을 가지고 저렇게 비장한 글을 썼을까. 우리 선배들의 나이에 따른 성숙도는 지금의 우리와는 확연히 달랐던 모양이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이 한목숨 기꺼이 바치겠다는 결연하고 비장한 마음은 도자 조각에 글로 남아 영원히 그렇게 있을 것이다. 어리디어린 여학생은 그날 저녁 목숨을 잃었다.


서울 둘레길을 걷다가 수유리 뒷산 쪽을 지날 때, 산 아래로 ‘4.19 민주 묘역’이 내려다보인다. 부정선거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항거하다가 차가운 저 땅에 누워있는 4.19 영령들은 작금의 우리를 어찌 보고 계실까?


해마다 봄이 되면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은 우리의 가슴으로 다시 돌아온다. 현대사의 가장 큰 민주화 운동인 두 사건을 저울에 올리면 어느 한쪽으로의 기울어짐은 없을진대, 4.19는 없었던 역사인 양 모두의 뇌리에서 잊힌 듯하고, 5.18은 해마다 더 커진 모습으로 돌아온다. 시간이 오래되어서인가? 두 사건의 시간 차이는 불과 20년 일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우리의 가슴에 달리 남아있는 것이냐. 왜 이렇게 기억하는 방법이 달라야 하는 것이냐. 4.19는 우리 헌법의 첫머리에 ‘不義에 抗拒한 4·19 民主理念’으로 규정되어 있는 혁명일진대, 추념식조차 무표정한 인사들의 의무 같은 얼굴 드러냄과 허공에 흩어진 너나없는 무관심에 허옇게 바래져 가는 잊힌 역사가 되어 간다.


돌아온 5월이 지나고 있다. 매년 경험했던 시간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다. 음습한 곳에서 그 정신을 폄훼하고 아픔을 조롱하는 자들의 비겁한 속삭임 때문일까. 하늘을 우러른 수천 번 날갯짓에도 풀리지 않는 하얀 素服의 解冤, 가라앉지 않는 분노와 붉어진 눈자위는 아픔을 다시 헤집는다. 한편으로는 그 뜻을 기리기보다 가지 않으면 反動이 될까 우르르 달려가는 정치꾼들의 의무화된 관례, 化石化가 되어버린 익숙한 儀式, 그들이 내지르는 그때의 가해자와는 무관한 현재의 정치적 반대편을 향한 날 선 비난,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는 고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정녕 그날에 민주주의를 외치다 가신 님의 함성과 같은 것이냐.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수십 년의 아픔과 갈등을 헤쳐내고 後代가 재단할 역사가 아니라는 국민의 뜻을 함의하여 당대에 하나의 역사로 정리하였다. 더 이상의 해석보다는 하나의 진실만을 보기로 하였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먼저 가신 님들은 침묵에 잠들어 있을 뿐이되, 과거를 끌어와서 오늘까지 先占한 자들의 有勢와 고함만이 비통의 거리를 휩쓸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저만치의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한다. 왜 열려있는 문으로 들어오지 않느냐고 소리치며 울부짖지만, 정작 들어가려면 빗장을 걸어버리는 모순에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다. 우리 모두의 것이라면서도, 주인은 따로 있어 허락받지 못한 이는 바깥을 맴돌아야 한다.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려는 이는 무릎을 꿇어야 하고, 눈물 한 방울을 기어이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얼마 전, 한때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자가 5.18 묘역을 참배하러 갔다가 봉변을 당한 일이 또 있었다. 열린 광장임에도 들어올 수 없다고 가로막은 그 행위를 아무도 제지하지 않으며, 제지하지 못하는 것이 정당한 행위가 된 현실이다. 왜 이런 일을 반복하는지 안타깝고도 의아하다. 그 후보자의 반응도 아쉽기만 하다. 나도 호남 출신이라며 열다섯 번을 외쳤다는데, 그도 5.18은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 아래 있는 것인가. 또한 어떤 누구도, 어떤 언론도 “나도 호남사람입니다”라는 그의 외침에 토를 달지 않음이 이런 상황이 고착되었음을 확인해 준다. 만약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나도 대한민국 사람입니다”라고 외쳤을 것이다.


大洋은 무한으로 넓고 크기에 더없이 평화롭다. 그곳을 헤엄치는 물고기 또한 평화로워 보인다. 평화로움은 조용하다는 말과 等値가 된다. 4.19는 물고기가 대양을 유영하듯 조용하고 평화로워 모두의 가슴에 열려있다. 그것은 차라리 적막하여 實在를 懷疑케 한다. 유달리 어수선한 올해, 4.19의 정신을 우리의 기억에서 어떻게 되살리는지 방송으로나마 반추해 보려다가 그마저 놓쳐버렸다. 이런 무신경이 4.19를 올바로 기억하는 마음이 아님을 나는 반성한다.


5.18은 알 수 없는 어느 닫힌 곳에 갇혀있다. 그물에 걸려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는 닫힌 곳에서 요란하게 발버둥 친다. 오래도록 그러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지친다. 5.18은 열려야 하고 늘 열려있어야 한다. 아무도 가두지 않았다. 누가 열어 주지 않아도 스스로 문을 열고 큰 바다로 나올 수 있다. 그날의 오월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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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에 참여하여 희생된 故진영숙열사(1946.5.15.~1960.4.19. 당시 한성여중 2학년의 편지)

‘어머님께.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구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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