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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과 개똥

by 동틀무렵

대장 속에서 나온 똥은 묻어버려야 하나.

회사를 은퇴하고 나니 강아지 산책시키는 일이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아니, 처음에는 산책을 시켰다가 맞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내 즐거움에 강아지가 동행한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가끔 연락을 주는 과거 인연들이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는 곤혹스러운 질문을 할 때면 강아지 똥이나 치우며 세월 보낸다고 탄식을 하곤 하지만, 온전한 사색과 내 몸을 적절히 일으켜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산책할 때마다 인도나 길가 풀숲에 보이는 강아지 똥들이 자주 눈살을 찌푸리게 했는데, 며칠 전부터는 유난히 더 많이 보인다. 쯧쯧…. 혀를 차다가 문득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눈이다. 눈 때문일 것이야. 며칠 전, 잠시나마 세상의 더러움을 모두 덮을 만큼의 꽤 많은 눈이 내렸는데, 새하얀 눈이 가진 미덕 아래에 그것을 묻어놓고 가버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리라.


강아지 똥은 눈 속에 그대로 묻힐 수 있으려나.

짙게 낀 두꺼운 구름이 하늘을 가려 햇빛이 땅에 내려앉지 않는다. 하늘은 무거운 채, 오랫동안 말이 없고 애꿎은 시간만 흐른다. 햇빛에 눈이 녹으면 드러날지 모를 똥이 두려운 사람들의 버팀은 날로 강고해져, 똥은 오래도록 뭉개어진 시간 속에 감추어진 채 있다. 아니 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일에 왜 두려움을 갖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 시간이 흘러 이제 눈 속에 똥이 있는지 없는지에는 관심을 거두고, 아예 눈에 덮인 채로 있기를 바라는 사람도 늘어만 간다.


대장 속의 똥은 그대로 두면 숙변이 되어 병이 된다. 궁극에는 항문을 찢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게 되나 오늘도 하릴없이 시간만 흐르고, 아예 그럴 시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은 ‘개’라는 표현을 싫어한(다고 한)다. 나도 개xx라는 욕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럴 때마다 지금도 옆에서 까만 눈망울로 쳐다보고 있는 나의 강아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호모사피엔스가 연약한 신체조건에서도 영장류의 유일한 지배종이 된 것은 늑대를 인간의 벗으로 만들어서 사냥과 방어 능력이 크게 높아진 것이 큰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과거에는 부정의 뜻으로만 쓰이던 ‘개’라는 접두사가 요즘에는 어떤 말을 긍정하여 강조하는 의미로도 쓰이고 있다. ‘개멋있다, 개맛있다’와 같은 시쳇말들이다.


나아가 ‘GSGG'라는 하는 그럴듯한 신조어도 등장했다. 뭔 뜻인지 모를 이 단어는, 지어낸 사람조차 ‘Govermemt Serves General G….’라며 얼버무리던데,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영어 실력에 도통 해석되지 않는 GSGG.…. 정부는 ‘장 자크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말한 ‘일반의G’를 제공한다고 해석하면 될지?


GSGG들이 판치는 세상. 그래서 ‘파스칼’이라는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사람을 오래 관측한 결과, 나의 강아지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뭇사람을 속여 양심과 함께 묻어버린 눈 속의 강아지 똥은 며칠이 못 가서 세상에 드러나고야 말았다. 썩은 냄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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