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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May 17. 2022

깜빡이 켜주어 고맙니더!

'깜빡이 켜주어 고맙니더!'

주말에 영주에 있는 무섬마을을 가게 되었다. 무섬마을은 몇 년 전부터 뜨고 있는 전통마을이다.

그 마을에 아내 친구가 있어 그저께 고향을 다녀오는 길에 잠시 들르게 되었다가 나오는 길에 들은 말이다.     

그때 나도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분께서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경광봉을 흔들며 교통정리를 하시길래, 수고하신다는 인사를 건넸는데 내가 하는 말과 그분이 하는 말이 섞여버려 정확히 듣질 못해 아내에게 물었다.   

’ 저분이 뭐라고 하시드노?‘

’ 깜빡이 켜주어 고맙니더! 카는데..‘     


마을을 빠져나오려면 동구 밖 삼거리에서 다리 쪽으로 우회전해야 하며, 방향지시등을 넣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인사를 했을까 하고 순간 갸우뚱했지만, 이내 충분히 이해가 되고 그분들의 애로사항을 느낄 수 있었다.     


무섬마을은 마을을 감싸는 강이 있는데, 여름날이면 새벽에 피어나는 자욱한 물안개가 장관이다. 

그 아름다운 강 위로 다리 하나가 있는데, 이 다리를 통해 마을을 드나들게 되어있다. 그런데 그 다리는 차량 두 대가 동시에 운행하지 못하고 한 대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좁은 다리여서, 다리 양쪽 끝에 안내하시는 분이 서로 신호하면서 한 대씩 교차로 통과를 시켜줄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었다.     


교량 앞을 지나서 마을 쪽으로 진입하는 차인 지, 아니면 다리 쪽으로 나가는 차인 지를 정확히 알아야, 안내하시는 분들끼리 신호 교환이 용이할 텐데 운전자들이 깜빡이 없이 운행하니, 직진하는 차량인 줄 알았는데 교량으로 진입하거나, 또는 반대의 경우에는 반대편 상황과 공유가 어긋나니 교통정리에 답답한 상황이 자주였던 모양이다.

오죽이나 그랬으면 내게 그런 인사를 했을까? 깜빡이 켜는 사람이 얼마나 적었으면 그렇게 말했을까?    

 

나도 깜빡이를 켜지 않은 운전자가 많음에 늘 안타까움과 속으로 불평이 있었으므로, 신호를 기다리면서 깜빡이를 켜는 비율이 얼마나 될까를 세어본 경우도 있고, 고속도로에서도 앞차가 IC로 빠질 때 깜빡이를 켜는지, 켜지 않는지를 스스로에게 내기를 건 적도 있었는데 결과는 늘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우리는 깜빡이에 아주 인색하다. 안전과 상대방과 소통하기 위한 차량의 기본 기능을 자주 무시한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거나, 좁은 골목길이나 교차로를 걷다 보면 다가오는 차량의 방향에 따라 멈출까, 건널까를 판단하는데, 다가오는 차가 직진이라 생각해서 멈추어 있는데, 깜빡이도 없이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가버리면 배신당한 듯이 기분에 운전자의 뒤통수에 대고 험한 말들을 소심하게  뱉어내며 기분을 누그러뜨리곤 한다.     


나는 깜빡이는 아주 잘 사용하는데, 심지어 아무도 없는 지하주차장에서도 거의 백 퍼센트 사용한다. 

회전할 때면 꺾는 방향 쪽으로 깜빡깜빡하는 램프 빛과 소리가 들려야 마음이 편하고, 회전도 더 부드럽게 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몸도 원심력에 반(反)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기우는 듯하여 아예 습관이 되어버렸다.  


한때 모시던 CEO의 철학은 ’경청과 배려‘였다. 

둘 다 단어적으로는 엄청 쉬운 말이지만,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쉽지 않은 단어들이다. 

배려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베푸는 그 무엇일 텐데 진정한 배려는, 

상대로부터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닌 내가 먼저 상대를 헤아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깜빡이는 남을 위한  ’배려‘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깜빡이 한번 켜는 것에 그렇게 인색한지 의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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