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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May 23. 2022

짧은 여행

지난주, 코로나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이 모이자는 연락에 고향을 갔다가, 자투리 시간에 홀로 추억여행을 하였습니다.      


고향마을을 추억하는 것이 내게는 소중하지만, 타인에게는 그리 소중할 것이 없을 것이기에, 고향마을 추억여행 이야기는 홀로의 가슴에만 담아두고, 인근의 ’임청각‘에 대한 이야기만 해보겠습니다.    

 

안동에 있는 임청각을 많은 분들이 아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안동사람들은 도깨비가 100칸 집을 하룻밤에 지으려다가 새벽닭이 울어 99칸만 짓고 도망을 갔다는 전설을 어릴 적부터 듣고 자라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외지인들은 2017년에 대통령이 취임한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임청각을 방문하여 좀 더 많이 알게 되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임청각은,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이신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선생의 생가이자 고성이씨의 종택입니다. 나라의 국운이 다하자 석주 선생께서는 불천위를 태우고 사당에서 신주를 꺼내어 땅에다 파묻고, 전재산을 팔아 가족들을 데리고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러 떠났습니다. 그분의 우국정신과 고난은 제가 감히 떠드는 것은 건방진 일이니,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에서 한번 찾아보시거나 석주 선생의 손부(孫婦)이신 ’ 허은’ 여사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라는 책을 권해드립니다.


임청각은 제가 자란 마을에서 불과 몇 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어릴 적에 자주 거기를 갔는데, 어린 시절 친구들이 몇 명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들은 임청각 인근에 살았는데 모두가 석주 선생의 고손자, 고손녀가 되는 후손들이었습니다. 석주 선생께서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으므로 그 후손들인 제 친구들 집도 그리 넉넉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중 특히 한 친구가 생각납니다. 그 친구 이름은 이동수였습니다.

나머지 친구는 지금도 연락이 되는 친구이니 생각이 나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동수는 어딘가에서 전학을 와서 초등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는데, 임청각의 조그만 행랑방에 의탁하여 식구들이 기거하였던 것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을 합니다. 대낮인데도 방은 컴컴했고, 옛 한옥이 그런 것처럼 문지방이 높아 방이 푹 꺼진 것 같은 작은 방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 가서, 행랑채로 보이는 건물의 여러 방중에 제일 끝방쯤 어디께로 생각하며 한참을 그 방앞에 머물러 회상에 젖었습니다. 

    

동수 아버지는 학교 앞에서 조그만 궤짝 같은 것을 놓고, ’오징어 게임‘으로 유명해진 ’달고나‘장사를 하였습니다. 그것을 내 고향에서는 ’ 팔자 곰(꼼)’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8자 모양을 찍어 그것을 모양대로 떼어내는 놀이였고, 설탕을 고은 것이니 ‘곰’을 붙인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박박 머리에 늘 해맑던 동수와 하교도 같이하고 동수네 아버지 장사하는데도 같이 가보고 친하게 지냈는데, 일 학기를 마치고는 대구로 또 전학을 가버렸습니다. 동수는 전학 가기 전에 자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 대구로 전학 간다~~. 대구에 가면 기와집에 살고, 테레비도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수는 ‘용용 부러워 죽겠지’하는 말투와 들뜬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고, 글짓기 시간에 이를 주제로 글을 써서 교실 뒤편에 붙여지기까지 했습니다.       


너무 자세해서 지어낸 이야기로 들리시겠지만, 오십 년 시간 넘어의 기억이지만 정확하다고 자신합니다. 


이상하게도 동수는 짧은 시간을 보낸 친구이지만 줄곧 잊히지 않고 내 머리에 맴돌며 성인이 되어서도 불현듯 지금쯤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오래전 유행한던 ‘TV는 사랑을 싣고 ‘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게 만약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찾아보고 싶은 세 사람 중에 한 명입니다.      

언제가 삼성 라이온즈 야구단에 이동수라는 선수가 있었는데, 연배가 턱도 없이 다름에도, 혹시 내 어린 친구 동수 인가하여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성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살던 동수가 대구로 가서  텔레비전도 있는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더 큰 도시로 이사 간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여하튼 어디서 무엇이 되었던 동수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기를 기원합니다.   

  

어린 시절 기억의 편린을 주어 모아 동수 이야기를 길게 썼습니다만, 이는 석주 선생께서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에 내 어린 시절 친구들의 고난이 심하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석주 선생께서 나라의 위급에 눈감고 재산을 보존하고 숨죽여 살았더라면

내 친구들도 편하고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독립운동가의 후속들의 삶이 대부분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삼대가 망한다고도 합니다.

내 어린 친구들이 살아온 과정을 함께 지나오면서 직접 보아 왔기에 백번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여 나는 그 후손 친구들을 볼 때마다, 까닭 모를 존경심과, 한편 늘 죄스러운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임청각은 석주 선생의 독립운동의 이유로,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아 임청각 앞마당이 잘리며 철길이 놓였습니다. 고택 바로 앞에 높이 4미터나 되는 철둑이 있었고, 무시로 기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다녔는데 일제의 의도적인 탄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작년에 안동까지 새로이 KTX 개통과 신역사가 생기고, 구안동역과 철길은 폐쇄되었습니다.

그 앞을 막고 있던 답답한 철둑을 허물고 복원공사 중이었고, 낙동강 푸른 물과 건너편에는 하동(河童) 시절 우리들의 아지트였던 ’꺽지 바위‘까지 보였습니다.     

(蛇足으로, 이번에 만났던 친구들과의 모임을 ’꺽지 바위회‘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이제야 그 길고도 어두운 역사를 다시 벗어나고 있는 우리들의 존경과 경외의 대상, ’임청각’을 다시 보며, 따사로운 봄 볕 속에 그때 친구가 절절히 생각난 짧은 여행이었습니다.     



※임청각 석주 이상룡 선생 가문에 전해 오는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쉰을 넘긴 석주 선생께서 가산을 정리하고 불천위도 태워 마당에 묻고 독립운동하어 만주로 떠났으니,

   임청각에는  감동스럽고 가슴 아픈 실제 이야기가 있다. “임청각의 생치(生雉) 다리”     


   "석주 선생께서 가산을 털어 중국으로 독립운동하러 간 이후,

    남아 있는 집안 식구들은 생계가  힘들었지만, 광복운동 관계 차 집안에 들리는 손님은 

    끊어지지 않았고, 대접을 잘 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밥상에 끼니마다 빠지지 않고 오르는 고기 한 접시가 있었으니, 

    이것이 유명한 생꿩(生雉)의 다리 하나였다.

    손님은 매우 당혹스러웠지만, 그걸 뒤집어 놓는 걸로 접구 한 시늉을 했고,

    그게 또 다음 상에 오르고....... [안동의 해학]


   접구((接口):안동을 대표하는 문화.

                    즉, 손님이 오면 꼭 무엇이라도 먹을거리를 대접하여야 하고, 손님은 음식에 입을 대야 한다
                    는 것.  접대는 주인이 하고, 접구는 손님이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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