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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Jun 16. 2022

황(黃)씨 고집의 내력

나의 성씨인 황(黃)씨는 고집이 세다는 선입관을 가진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나는 황 씨라는 것 때문에, 정당한 소신도 고집으로 매도당한 경험이 자주 있는지라, 왜 그렇게 낙인찍혔는지 그 유래가 자못 궁금했는데, 막연히 우직함의 대명사격인 ‘황소’에서 느끼는 뉘앙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지냈습니다.    


황 씨의 黃(누를 황)은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내린 여섯 개의 성씨 중의 하나로,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삼라만상의 색 중에서도 으뜸으로 쳤다고 하며, 우리가 단군왕검을 우리의 시조로 생각하듯이, 중국 한족은 三皇五帝시대의 황제(黃帝) 헌원氏를 국조로 치고 있는데, 이 사람은 임금을 뜻하는 皇帝가 아니고, 黃帝인 것으로 보아 그들이 누를 黃을 으뜸 색으로 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만, 우직함의 뉘앙스에 더하여 그 어감 또한 그리 아름답지는 못하는 것은  인정하는 바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성씨의 다수가 조선시대의 모화사상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하는 경향이 심하나, 과거와 현재의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우리의 성씨가 중국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양평에 있는 ‘소나기’의 소설가 ‘황순원’ 문학관을 갔다가 황씨가 고집이 세다는 유래를 있게 한 분을 처음으로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황씨 고집의 유래를 만든 조선 선비는, ‘제안 황씨‘이며, 본관이 '평해'인 나와 본관이 다르기는 하나, 우리 황家들은 ‘落’이라는 한 분의 조상에서 유래가 되었으니, 우리와는 전혀 핏줄이 다르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황순원 선생은 이 조선 선비의 8대 방계손이라고 합니다.    

어릴 적 어머니는 아버지와 어떤 문제로 티격태격할 때면,

‘고집도 고집도 저런 고집이 있나? 옛말에 ’평해 황고집‘이라 하더니만...!’

라는 가벼운 타박으로 두 분 사이의 가벼운 다툼을 종결하곤 했습니다.     


그분은 조선 중기 때의 인물로 ‘순승(順承)이라는 인물인데, 평양에 살았던 관계로 ’평양 황고집’이라는 말이 생겼을 것으로 생각되며, 일가들은 이런 연유를 잘 모르고 ‘평해 황고집’으로 와전하여 사용한 듯합니다. 



이제 황씨 고집의 유래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순승(順承)이라는 분이 남기신 일화들입니다. 이분이 얼마나 자기에게 엄격하고 모든 일에 법도를 지키려고 했는지, 남들에게는 기행으로 보일 정도의 엄격함(?)이었으니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느 날 마을 앞 개울에 다리를 세웠는데 다리 위를 덮은 흙에 하얀 석회가루가 섞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황고집이 인부를 불러 어디 흙이냐고 물었고, 인부가 말하기를 오래된 무덤 부근에서 흙을 가져왔다고  자, 호통을 치고는 평생 그 다리 위로는 다니지 아니하고, 아무리 추운 엄동설한에도 강물을 건너 다녔다 합니다. 조선시대의 묘에서 더러 미이라가 발견되는 것은 조선시대의 매장 풍습에 기인하는 것인데, 조선조의 매장 풍습은 관을 석회 반죽으로 둘러싸는 매장 풍습으로 그것이 공기를 차단하여 미이라가 되는 시신들이 더러 발견되는 것이고, 즉 다리 위의 흙을 어느 무덤에서 퍼온 흙으로 덮은 거라는 것이어서, 남의 무덤의 흙을 밟고 다니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황고집이 한양에 다니러 갔는데, 볼일을 다 본 후 평양으로 되돌아오려는데 우연히 친구를 만나, 다른 친구의 부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보통사람이면 바로 문상을 가겠지만, 다른 목적으로 한양에 왔는데 바로 문상을 가는 것은, ‘죽은 벗에 대한 예의가 아닐세’하며, 다시 일주일이나 걸리는 평양으로 가서의복만 다시 정제한 후 다시 그 먼 한양으로 문상을 갔다고 합니다.   

  

-황고집은 논 중에 집에서 가까운 가장 좋은 논을 조상 제상에 쓸 쌀을 생산하는 용도로만 정해놓고 그 논에는 절대 퇴비도 쓰지 않고 쌀뜨물로만 거름을 주며 정결하게 농사를 지었는데. 어느 날 보니 하인이 그 논에서 논을 가는데 방귀를 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조상 제사에 쓸 쌀을 생산하는 논에서 방귀를 뀌었다 하여, 그 논에 물을 빼고, 새물을 대고, 또 물을 빼고, 새물을 대고, 이러기를 3년을 하고서야, 이제는 방귀 냄새가 다 우려 졌겠지 하고 그해부터 새로 농사를 지어 제사를 모셨다고 합니다.     


-조상을 모시는 일에 너무나 엄격하여, 제사에 쓸 물건이나, 음식물은 한 푼도 깎는 법이 없어 상인들이 그분에게는 아예 값을 올려 팔아도 깍지 않고, 조상을 모시는 일에 어떻게 값을 깎느냐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당숙과 함께 성묘를 하러 갔는데, 황고집이 묘가 있는 산까지 얼추 20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서, 눈이 녹은 진흙탕 길을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당숙이 왜 그러냐고 묻자, “묘가 있는 산이 보입니다! 조상묘가 있는 산이 보이는데 어찌 말을 타겠습니까?”하여, 당숙도 할 수 없이 말에서 내려 천신만고 끝에 성묘를 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뒤 당숙은 늘 그 일을 말하며  “쯧쯧, 순승아!”라고 혀를 차며 다시는 같이 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황고집이 밤길을 가다가 도적떼를 만나서 타고 가던 말을 빼앗겼는데, 얼마를 가다가 걸음을 돌려 돌아와서는 손에 잡고 있던 채찍을 도적들에게 주면서, “말이 말을 듣지 않으면 이 채찍을 쓰시오!”라고 말하고는 되돌아갔습니다. 도적들이 놀라서 “당신 혹시 황고집 씨가 아니오?”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도적 떼는 “현자(賢者)가 타던 말이다”라고 하며, 말을 돌려주고 그냥 가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에게 엄격하고 법도에 어긋난 일은 평생 한 번도 하지 않아서 나라에서도, 그분을 존경하여 그 집 앞에는 하마비를 세워 그분을 기렸다고 하며. 스스로도 호를 집암(執菴)으로 하여 그 엄격함을 평생을 지켰다고 합니다. 


조선의 별난 사람, 별난 기행을 모은 ‘기인 기사‘열전에도 이분이 나오고, 구한말 우국지사 장지연 선생이 서술한 ’ 조선 유교 연원‘이라는 책에도, 설총부터 퇴계, 송시열 등 기라성 같은 유학자들과 함께 이분도 등재가 된 것을 보면, 단순히 기행과 고집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예학(禮學)에 뛰어난 유학자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서두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황씨의 이미지는 다소 우직하고, 또 투전판에서 패가 나쁠 때 쓰였다는 망할 황(巟)때문에 속어로서 자주 쓰이는 ’말짱 황‘, 황소고집의 고집불통의 이미지, 그리고 오래전 드라마 속의 어설픈 동네 아저씨 ‘황씨 아저씨 인해 어감이 매우 아름답지는 않으나, 황씨의 고집이 단순한 고집과 아집이 아니라 예의를 중시하고 자신에게 엄격했던 한 선비의 행동에서 유래해왔다는 것을 이해하고는, 

올곧은 심성과 스스로의 엄격함을 가진 훌륭한 가풍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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