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틀무렵 Sep 26. 2022

그 녀석,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1)

세상에는 안타까움의 시선을 받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나의 일반화된 생각과 보이는 것으로만 사람들을 함부로 평가하고 재단하지 말아야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과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안타까운 삶을 사는 사람들.

그들 중에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 버림받고 혼자서 이 모진 세상을 견뎌야 하는 아이들이 있다.     

자기 성도 모르고, 이 세상 70억 인구 중에 자기와 연관이 있는 단 한 사람도 없는 아이들,

부모에게서 버려진 채, 국가의 보살핌으로  저 홀로 커가는 아이들,

떼쓰는 것도 모르고, 규율 속에서 잘 웃을 줄도 잘 모르는 아이들,

자기만의 옷이나, 자기만의 신발도 없는 아이들,

틈만 나면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이들,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지만 항상 사랑과 모든 것으로부터 부족한 아이들이다.      

    


십수 년 전, 아내가 어쩌다가 동네 분들 몇몇과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아직 돌이 안된 한 아이를 알게 되었다. 아마도 젊은 부모의 철없는 사랑의 결과로 잉태된 생명을 병원에서 낳고 도망가버린 결과로 남은 아이였다.      


가끔 집에 데려와 며칠을 함께 지내고 다시 보내주곤 하였는데, 우리 아이들이 커가니 아내도 바쁘고, 또 며칠만 아이 돌보면 몸살 걸리는 아내의 체력도 여의치 않았고, 또 가끔 데려와서 위탁하는 것이 아이에게 정체성의 혼란이 생겨 오히려 해가 되지 않을까 처음엔 저어했는데, 그래도 그것이 아이들의 발달에는 큰 도움이 된다고 하기에 지속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너무나 정이 들어 버렸고, 아내와 같이 데리러 가면 웃는 얼굴로 “아바 아바“하며 내게도 곧잘 안기곤 했다. 집에 데려오는 차 안에서 눈길 한 번 안 주고 눈을 새초롬하게 내려 깔고 삐친척하다가, 집에 도착하면 까불고 장난치고 우리 집에 아주 익숙해졌다. 언젠가 우리가 우리 집에 오래 있다가, 다시 보육원에 데려다주었을 때, 선생님 품으로 넘기는 순간 서러운 눈물을 터트리며 갑자기 앙~ 울어버리는데, 나도 왈칵 눈물이 나오며 아픈 가슴이 콱 치밀어 올랐다.      


아내는 “당신! 참 웃긴다. 이상하네 “ 하더라만, 저도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걸 못 감추지 못하였다.  

   

그 녀석이 우리 집에 와있으면 세상을 다 얻은 듯 가족 모두가 행복했고, 집에서 뭐 하나 빠졌던 것이 꽉 채워진 느낌이었고, 뭔가 안심이 되는 집안 분위기가 되었는데, 주변에서는 하필 나를 닮았다고 얼마나 입을 대는지, 내가 먼저 데려오자고 했으면 아내로부터 모진 의심을 받을 뻔했다.       


동네 분들 몇 분이 각자 한 녀석씩 맡아 그러다가 하나둘 슬그머니 발을 다 빼고, 우리 집만 그러지 못하고 자꾸 가슴 미어질 만남과 이별을 대책 없이 되풀이하였는데, 어느덧 이년 가까운 시간이 되어 버렸다.

잘 키울 능력만 있다면 내 아이로 품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했지만, 당시의 나의 경제력이나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스산한 말들이 난무하던 시절의 불안정한 직장생활과 미래를 생각하면 그것은 어림도 없었고, 아내와 늘 ‘우리 준이 좋은 집에 입양되게 해 주소서!‘ 하고 중얼거려보지만, 입양의 축복이 이 녀석에게는 쉬이 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입양이 되지 않으면, 만 세 살이 되면 고아원으로 가야만 한다. 고아원에 가도 가끔씩 보려고 마음은 먹지만, 그게 이 아이에게 뭐가 도움이 되고, 또 철들면 오히려 아이에게 상처 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더 늦기 전에 세발자전거도 태워주고 싶고, 우리 아이들에게 했듯이 밤마다 옆에 눕혀놓고 백설공주도 읽어주고, 인어공주도 읽어주고 말문도 트게 하고 싶었고, 같이 여행도 가야지 하는, 오만가지 상념들이 밤마다의 잠자리를 어지럽게 했다.     


그리하여 가족여행이 자주 없던 우리 가족도 그 녀석과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해 늦은 여름에, 큰 맘먹고 지리산 자락에 민박을 구하여 늦은 휴가를 떠났다. 그 녀석과 여행을 해야지 하는 우리들 간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었다. 식구들과 물놀이하면서 깔깔거리는 녀석을 볼 때마다 즐거움과 함께,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 내내 맘이 편치 못했다.


그렇게 즐거웠던 그 여행 얼마 후,

대책 없는 만남과 이별을 계속했던 그 녀석이,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대로 갑자기 입양되어 떠났다. 우리가 너무 애틋해하니 보육원에서 입양 희망자분께 좀 더 적극적으로 이 녀석을 보였다고 한다.


언젠가는 거쳐야 할 이별이,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렇게 갑자기 올 줄이야....   

지리산 자락 어느 계곡에서 같이 물장구치고, 물놀이하던 녀석이,

차만 타면 마치 제 엄마인 양 안겨서 잠들던 녀석이,

아침에 일어나서, 저를 지켜보던 우리 식구를 보면 헤벌쭉하며 웃던 녀석이,

우리 딸아이 무릎에 연신 고개를 파묻으며 행복해하던 녀석이, 지리산 자락의 추억이 이별 여행이 되었다. 그다음 여행은 꼭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중년의 사내가 컴컴한 방구석에 혼자 앉아, 가슴이 콱 막히고 치밀어 오르는 그 무엇의 슬픔을 감내치 못하고 숨죽여 울었다. 늘 우리가 바라고 바라던 일이 실현되었는데, 그렇게 헤어짐은 감당이 되지 않았다.      



베란다에 있던, 그 녀석의 세발자전거가,

신발장의 그 녀석의 삑삑이 슬리퍼와 운동화가,

가을에 입히려고 개어 놓은 청바지와 노란색 티셔츠가,

엘리베이터 앞에 세워져 있던 그 녀석의 유모차가, 출근길 아침을 오랫동안 슬프게 하였다.     


그렇게 그해 여름은 마지막 가는 날까지 나를  울게 하였다.      





작가의 이전글 秋江抒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