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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Jul 13. 2022

일 년 반 백수의 소감(小感)-1

-소감을 所感이라 하지 않고, 小感이라 한 것은 느낀 바 라기보다 아주 소소한 생각 쪼가리이기 때문이다.    

퇴임 후, 고상한 말로 하자면 안분지족(安分知足)이요, 처량하게 말하자면 무위도식(無爲徒食)이며, 시쳇말로 하자면 ’ 백수‘의 시간이 어느덧 일 년 반이라. 무위도식이라도 진정한 무위(無爲)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생각이 없을 수 없겠는가? 나름 생각은 많아지나 담대한 것은 못되고 오히려 생각 자체가 쪼그라들고 소소해지니 이 또한 무위의 시간 때문인지, 나이가 들어감에 따른 현상인지, 사회와 경제활동으로부터 단절된 환경변화에 따른 것인지는 딱 하나의 답으로 정하기는 어렵고, 아마도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그리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소한 생각이라도 글로 옮기면 혹 나의 무위를 조금 위로할까 하여 조각조각들을 한번 써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길 가다가 문득 보이는 사물, 갑자기 나타나는 현상과 반복되는 생활에서 짧게 스쳐 가는 생각들로서, 깊은 사색의 결과물이 아니니 오히려 생각의 얕음을 드러내는 우매한 짓인 줄 뻔히 알면서.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이유.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백수의 처지를 변명하며, ‘야! 나도 아직 이 정도로 쓸모가 있어!’라는 것을 과장되게 말하고픈 심리를 표현하는 우스개일 것이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가기는 하나, 그 이유는 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한다. 백수가 과로할 리는 없다.     

 

이는 나의 계획된 시간인가, 아니면 타인에 의해 끌려가는 시간인가에 따른 이유가 아닐까 한다. 먼저 퇴임한 이들에게 자주 들은 말이, 친구나 회사 후배들이 부르면 군말 말고 나가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백번 맞는 말이다. 피치 못 할 정당한(?) 사유가 있으면 한 번은 거절할 수 있으나, 두 번 거절하면 다시는 불러주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같은 시기에 은퇴한 친구에게 운동 한번 하자고 연락했다가, 떨떠름한 반응을 받고 보니 그 친구에게는 또 연락하기가 꺼려지는 경험이 있는 것을 보니.     


얼마 전 성북천을 따라 열심히 걷기 운동을 하는데, 톡이 왔다. 과거 상사로부터 운동하자는 문자였는데, 정해준 날에 선약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다른 날짜를 주는데 또 선약이 있는 날이었다. 죄송하다고 간단히 답을 드리고 걷기에 열중했는데, 아차! 내가 거절한 모양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 다시 길게 문자를 보냈다. ‘마치 거절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옵고...’하며 톡을 보낸 후 또 다른 날짜를 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날은 가능한 날이었다. 바로 이런 것일까?      


불러주는, 만나자는, 밥 먹자는, 소주 한잔하자는 그 누군가가 있으면 가능하면, 웬만하면 응해야 한다. 그래서 백수의 시간은 나의 계획보다는 타인의 요청에 응하는 시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내가 이끄는 시간보다 남이 이끄는 시간이 많다 보면 심리적으로 괜히 바빠지는 것이 아닐까? 그 시간을 좇아가니 허덕거리게 되고 그래서 과로사한다는 우스개가 나온 것 일게다. 그러나 그게 어떻든 간에 연락해주고 불러주는 사람은 늘 고마울 뿐이다          


계획보다는 결과가 많은 시간들.

회사 다닐 때는 일주일 또는 길게는 두세 달 앞의 각종 회의, 보고, 행사 등이 캘린더에 새까맣게 기록되어 있고, 그 시간을 십분 단위로 쪼개어 시간을 잘 활용되도록 하는 것, 그 자체도 일 중의 하나였다.      


퇴임 후에도 과거의 습관이 이어지고, 하루의 시간이 백지상태로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이 너무나 괴로울 것 같아, 백수 첫날부터 내가 행동한 것은 구글 캘린더에 꼼꼼히 기록했는데, 계획은 듬성듬성한데도 지나간 시간은 그래도 제법 빼곡했으며 이것을 볼 때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뿌듯해지기까지 했다. 뜯어보면 뭐 그리 대단한 결과도 아니고, 일상의 결과를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지금 나의 시간은 계획보다는 결과만 남는 시간’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계획이 확실한 삶을 지향하지만, 현재의 나는 팝 아티스트 ‘존 레넌‘의 ’인생이란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한 가운데 슬그머니 일어나는 일‘이라는 말에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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