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틀무렵 Aug 17. 2022

일 년 반 백수의 소감(小感)-6

몰랐던 세상 들_중고 시장

회사를 잘린 날, 기어이 남은 이들에게 붙잡혀 마지막 술 한잔(?)을 거나하게 마시고, 그다음 날은 종일 널브러져 있었다. 이제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이구나 하는 편안함도 느끼는 가운데, 이제 무엇을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은퇴 후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분명히 맞는 말이긴 하나, 나는 항상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이후는 나중에 또 생각해도 된다는 主義였다.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질문의 첫 번째 답은 책이나 왕창 읽자는 거였다. 어쩌면 가장 쉬운 답이었다.


정리하면서 버려야 할 책들 몇십 권을 추렸는데, 버리기가 아까워 현관 앞에 내어놓았다가 다시 서재로 들였다가를 며칠 고민하다가, 혹시나 하고 ‘중고서적’을 검색해보니, 인터넷 서점에서 중고 책들이 체계적으로 거래가 되고 있었다. 바로 방법을 학습하고 판매 등록을 했다. 팔고자 하는 책의 바코드를 찍고, 등록하면 바로 대략 가격이 나왔고, 포장하여 현관에 내어놓으니 며칠 내에 수거해가더니 바로 입금되었다. 종이 냄새 폴폴 나던 중고서점만 알고 있던 나였다. 햐! 내가 회사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 세상은 이런 것이 돌아가고 있었구나.


이 경험이 자못 신기하여 친구들이 모여있는 톡방에 공유하니 그런 것도 있었나 하면서 고맙다고 하는 것을 보니, 우리 또래 세대들은 잘 몰랐던 모양이다. 중고거래가 인터넷 거래뿐 아니라, 오프라인 매장도 가봤는데 너무나 깨끗한 책이고 거래가 체계화되어 있었다. 싼값에 책을 사서 좋기는 했으나, 중고로 책이 거래되면 작가들에게 인세가 없을 터인데작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리의 또 하나는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을 버리는 것이었다. 자취생활, 주말부부의 오랜 혼자 생활에서의 습성인지 가능한 단출한 생활을 지향해왔는데, 여기저기 애매한 물건들이 꽤 굴러다니고 있었다. 주로 크고 둔중한 초기 모델의 스마트워치 등, 오래된 IT 기기들이었다. 버리려 하는데 딸내미가 ‘당근에 팔아 보소.’하기에, 이런 구닥다리를 누가 쓰냐 하면서도, 말만 들었던 중고거래 사이트에 가입하고 물건을 내놓았더니, 하루 내에 거래요청이 왔다. 이 또한 내게는 신기한 경험이었는데 내게는 전혀 필요가 없고 이걸 누가 쓸까 하는 것들이 남에게는 필요할 수도 있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IT 기기가 나오면 금방금방 바꾸는 신세대들인데 중고를 사는 젊은이를 보니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여, 교통비라도 하라고 내가 먼저 깎아주기도 했다.


       

백수도 경험치가 다르다.

과거에는 이동 시에 거의 모든 것을 자가용에 의존하다가, 은퇴 후에는 시간적으로도 그럴 필요도 없고, 또한 비용면에서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었다. 지하철이야 노선도 하나만 있으면 되지만, 버스를 타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집 앞 버스 정류장에 가서 다니는 버스 번호와 노선도를 정성스럽게 촬영하여 폰에 저장했다. 이제 됐다. 앞으로 어딜 갈 때 이 노선도 보고 다니면 되겠다 했다. 지하철을 타면 눈 둘 데가 없어, 스마트 폰이나 들여다봐야 하니, 나는 좀 번거롭게 조금의 시간이 들더라고 버스를 타면서, 길거리 풍경도 눈에 담고, 지리도 익히는 것도 나름 즐거움의 하나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쯤인지를 검색하다가, 도착지만 입력하면 자가용, 도보, 자전거로 가는 길과 시간을 알려주고, 대중교통은 어떻게 가면 되는지를 정확히, 상세히 보여주는 앱을 발견(?)했다. 나중에 보니 대부분의 지도 앱에는 그런 기능이 있으니, 발견이라기보다 세상이 다 아는 것을 나는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올해 봄에 74Km에 달하는 북한산 둘레길을 몇 차에 걸쳐 종주하였는데, 의정부, 양주 등 외곽지역 산기슭에서도 귀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너무나 편리한 세상이다.

    

한달 전 친구 아들 결혼식에 갔을 때, 금년 초에 은퇴한 친구가 버스 타고 왔다면서, ‘인터넷에서 버스노선 검색하면 되더라’하면서 의기양양했다. 속으로 코웃음 치면서 ‘그게 아니고 지도 앱을 쓰면, 더 자세히 알려주니 맵을 써봐’했다. 백수도 익어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얼마 전에 지인의 장인께서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회사 시절 경쟁사의 임원 출신이 전화를 주어, 부의하고 싶다고 계좌를 묻기에, 계좌는 모르니 OOO톡의 경조금 보내기로 하라고 했더니, 귀찮고 모르겠다며 기어이 계좌번호를 좀 알아봐 달라고 한다. 실례를 무릅쓰고 당사자에게 물어서 해결(?)은 해주었는데, 그분도 IT분야에서 일했던 분이다. IT라는 것의 범위가 워낙 방대하지만.

또 하나, 친한 친구가 발목을 다친 지 일 년이 넘어도 걷기에 불편하다고 하기에, OOO톡으로 발목 보호대를 선물로 보냈더니 깜짝 놀란다. ‘이런 게 있어!. 너는 이걸 어떻게 알아? 대단해.‘ 참 별게 다 대단하다. 이 친구도 사회적 성취를 이룬 친구이다. 주변의 대부분이 이런 상황이다.

  

나는 IT분야에서 일한 덕분에 주변의 젊은 친구들이나, Early-Adopter들 덕분에 자질구레한 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나, 노령층들의 디지털 문맹이 사회 문제화되고 있다. 키오스크 가게에서 주문을 못 해 쩔쩔매는 노인들의 뉴스도 있고, 나도 얼마 전 아이스크림 무인 가게를 갔다가 결제를 대신 좀 해달라는 분을 도와준 적도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노령층들의 디지털 문명에서 뒤처지는 것은 꼭 나이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새로움에 대한 귀찮음과 접할 기회가 적음에 따른 현상이 오히려 그 원인 아닐까 한다. 교육도 받고 귀찮더라도 사용하고 세상의 틈새 변화를 놓치면 안 된다. 


오늘 ’다이소‘에 가서 물건을 사고 무인 결제하려는데, 점원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도와주려고 한다. 흰머리를 보고 도움이 필요하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아주머니저 아직 괜찮아요!          

작가의 이전글 새벽 산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