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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Oct 18. 2022

일 년 반 백수의 소감(小感)-7

-소감을 所感이라 하지 않고, 小感이라 한 것은 느낀 바 라기보다 아주 소소한 생각 쪼가리이기 때문이다.


 측은지심이..

요즘 ‘도시 어부‘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라고 하는데, 나도 한때 바다 도시에 살면서 낚시의 재미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 도시를 떠나고도 한동안 짜르르한 손맛을 못 잊어 밤마다 상상으로 달랬지만 이제 잊힌 과거일 뿐이다. 낚시라면 질겁을 하던 아내가 재밌다고 자주 보기에 옆에서 듬성듬성 보았더니 잡은 물고기를 희롱하고 산채로 회를 뜨는 것을 보니, 차라리 낚은 후에 방생하면 프로그램이 더 빛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도 죽을 때 공포와 고통을 느낀다고 하여 ‘인도적 생선 손질’의 국제 기준을 만든다는데...


시간의 여유인지, 길가다가 어쩌다 보이는 곤충 한 마리, 길가의 풀 한 포기에도 자꾸 눈길이 간다. 저 녀석들은 어찌하여 저렇게 생겨나 오로지 생존의 본능으로만 살아가고 있는지 안쓰러운 생각이 먼저 든다.

     

놀이였다. 곤충과 식물을 채집하여 제출하는 것은 여름방학의 필수 숙제였다. 강둑과 들판을 다니며 잠자리, 메뚜기며 나비를 잡아 판에 고정하여 온전한 모습으로 정형되길 기다렸다. 날개를 파르르 떨며 녀석이 보내는 고통의 신호에도 미안하기는커녕 숙제를 해치웠다는 마음뿐이었다. 웅덩이 가에서 커다란 눈을 한 점에 고정하고 먹이를 노리는 개구리를 막대기로 내리쳐 두 다리를 쭉 뻗은 개구리를 보며 쾌감을 느꼈고, 논의 피를 뽑아 낚싯대 삼아 무수한 개구리를 유혹하여 패대기쳤다. 중학교에 진학하니 해부 공부를 한다고 개구리를 잡아 오라는 적도 있었다. 어설프게 배를 가르고 심장을 떼어내 유리판에 놓으면 밥알보다 작은 검푸른 심장이 한참을 팔딱거리는 것을 신기하게만 봤다. 잠자리를 잡아 몸체의 반을 자르고는 꽁무니에 지푸라기를 꽂아 날리면서 장가보낸다고 손뼉을 쳤다. 여름이면 물고기를 잡아 배를 눌러 내장을 빼내기도 했고, 살아 있는 방아깨비며 메뚜기를 뜨거운 아궁이에 구워 먹기도 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가을에 영글 유전자를 만들고 있는 놈을 기어이 땅에서 분리하여 책갈피에 끼워 말리는 것으로 식물을 채집했다. 어린 시절 그 행동들은 그때는 학습과 숙제이자 놀이였으나 지금에 생각하면 가녀린 생명에 대한 무지한 살생과 폭력이었다.

     오래전 사무실 이사를 했을 때, 이사 후 새 사무실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의욕과 기분을 느끼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상사가 나를 찾더니 크게 화를 내면서 호통을 치셨다. 시들어 거의 죽었다고 생각하여 버리고 온 큰 나무 화분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한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투덜거리며 가져오자 끝내 나무를 살려서 흐뭇하게 바라보시곤 했다.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제야 그분의 마음에 뒤늦은 공감이 밀려오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 큰 이유는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에 대한 측은지심이 타 생명을 바라보는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당연히 쉬면서 즐겨야지 하는 주변인들은 무슨 측은지심이냐고 하겠지만, 생산적인 것으로부터 비켜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구체화된 속박 없이 때에 맞춰 먹을 것을 취하고 반드시 해야 할 그 어떤 목적 없이 존재하는 삶이라는 생각이 뭇 생명들에게 동질의식이 느껴지고 있다면, 이 또한 그 녀석들을 가벼이 보는 것일까. 게다가 은퇴 후 나와 부쩍 더 가까워진 강아지도 한 이유일 것이다. 저 녀석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슨 낙이 있을까는 동정이, 생명이 뭔가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하고 있다.      


척박한 땅에 뿌리박고 꿋꿋하게 버티는 잡초도 그것이 견딘 시간을 생각하면 함부로 뽑기가 망설여진다. 쌀쌀한 초봄에 아스팔트 틈을 비집고 피어난 패랭이꽃을 보면 이쁘기보다 안쓰러운 마음이 앞선다. 무심히 잡던 파리나 거미도 이제는 창문을 열고 쫓아내는데 더 공을 들인다. 생선을 먹을 때면 이 녀석도 한때 저 푸른 바다를 마음껏 유영하던 자유로운 생명이었겠지 하는 생각이 들고, 고기를 보면 동물도 제 죽음을 감지할 때 눈물을 흘린다는 말이 떠올라 마음이 처연해진다. 불과 몇 주를 비좁은 사육장에서 살다가 어느 날 식탁에 올라와 있는 맛난 치킨을 보면 가던 손이 잠시 멈칫한다. 그러나 성가신 모기에는 가차 없는 것을 보면 ‘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모기에게 물리다니,’라고 읊은 저명한 하이쿠 시인의 관조(觀照)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이쿠(俳句배구), 일본 고유의 짧은 시)     


인디언들은 사냥감의 목숨을 끊을 때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미안하다. 지금은 내가 너를 먹지만 나중에 내가 죽어 너의 후손들의 영양분이 되어 줄게. ‘라고. 자연의 섭리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이제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 줄기 연기로 사라질 뿐이니 이 순환 생태계에 내가 보태 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어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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