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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Dec 22. 2022

개근상

 ‘개근상’.  먼 시간에 박제되어 있던 단어가 불쑥 눈앞에 나타나 생소함을 준다.

  무엇이라도 배우고 싶은 갈증과 숨죽여 있지 않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은 마음에, 지난가을에 K 대학 평생교육원에 강좌를 신청했다. 열다섯 번의 강좌가 지난주에 끝이 났다. 마지막 날 교수님께서 학생들 책상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시듯 책상마다 파란 종이 홀더를 놓아두셨다. 홀더 안에는 수료증과 함께 ‘개근상’이라는 표창장이 들어 있었다. 강의 첫날부터 결석하고, 공부보다는 노는데 정신이 팔려 중간에 또 한 번을 ‘농땡이’를 쳤는데 개근상이라니. 개근상…. 몇십 년 만에 보는 단어 앞에 잠시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참석할 때마다 그럭저럭 숙제를 제출해서였는지, 어떤 날수 이상으로 출석하면 개근으로 처리하는지는 굳이 여쭈지는 않았다. 상이란 밥상이어도 기분을 좋게 하는 거니까.

     

 그런데 ‘개근’의 ‘개’의 뜻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졌다. 오래 알고 있는 단어이지만 정확한 뜻을 알고 사용한 것 같지 않은 것 같다. 요즘, 글짓기 수준의 글이지만 긁적거리다 보니, 글자마다 그 정확한 뜻을 모르고 사용했던 단어들이 꽤 많은 것이 느껴져 밑천의 얕음을 자주 한탄하고 있다. ‘모골이 송연하다‘의 ’悚然’, ‘유명을 달리하다’의 ‘幽明‘ 같은 단어들이다. (부끄럽지만 유명을 ’有命‘으로 알고 있었다)

     

 ‘개근(皆勤)’의 개(皆)는 ’다, 모두‘를 뜻한다. 즉, ’다, 모두 부지런했다’라는 의미이니, 개근상은 성실하고 부지런했다는 증표이다. 학창 시절, 초중고 십이 년 동안 단 한 번도 수업에 빠진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도 육 년 개근상을 받았고, 고등학교 졸업 시에도 개근상을 탔다. 특히 어린 시절에는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이 빙빙 도는 심한 어지럼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 가끔 찾아왔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께서는 부엌일 하시다 말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학교로 달려가 아들의 결석을 미리 알리셨으나, 기어이 일어나 지벅거리며 학교에 가서 나의 책상을 지키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아쉽게도 중학교 때는 수업에 빠지지 않았음에도, 방학 중 선생님과 학생 간의 전달이 꼬인 어느 소집 날 반나절의 결석이 나의 개근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억울한 기억이다. 당시에는 방학 중에도 광복절 등, 국경일 기념식이나 대청소 등으로 등교하는 날이 더러 있던 시절이었다.

     

 과거에는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것은, 최고의 덕목이었다. 우등상에 적힌 표창 내용도 한결같았다. ‘위 학생은 근면 성실하고 행동이 방정하며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이에 표창함’이라는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것이, 칭찬의 대명사이던 시기는 아마 모두가 90년대 이전 시절까지 일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근면, 성실보다는 게으르지만, 창의적이고, 수시로 아이디어가 번득이는 사람을 선호하고 높이 사는 사회가 되었다. 성실하고 근면하다는 것은 달리 보면 특별한 재주나 특기가 없고 평범하거나 심지어 우둔하기까지 한 사람을 적절히 또는 감싸는 말에 그 역할이 있는 듯하다.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같은, 한 사람의 천재가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고 나아가 인류 역사를 바꾸고 이끌어 간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근면 성실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독하다는 평을 하기는 한다.

     

 학창 시절 개근상이 결코 나의 부지런함을 보증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고난 근면함이라기보다, 외아들로서 집안의 기대를 받고 있다는 분위기가 느껴진 탓에, 뭐든지 바르게, 근면 성실한 모범생이 되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드러내지 않는 기대에 순응한 결과이다. 묵묵히 끊임없이 무엇을 하기보다, 뭔가 새로운 방법으로 쉽게, 빠르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재미있고 관심이 쏠리는 것을 보면 나는 꽤 게으른 축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게으름은 부도덕이 아니라, 발명과 개선을 추동시키는 힘이라는 관점에서 미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글을 쓰는 데에서는 게으름의 미덕이 통하지 않는다. 쉽게, 빠르게 하는 방법이 없다. 붓을 들면 일필휘지로 문장을 써 내려갔던 옛 선비의 모습을 늘 그리지만, 평범보다도 더 아래에 있는 둔재로서는 언감생심이다.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게, 생각의 조각으로 뼈대를 만들고 여위지도 살찌지도 않게 알맞게 살을 붙이다가 떼다가 하면서, 쓰고 또 쓸 수밖에 없다. 혹시 알겠는가? 그러면 먼 후일 내가 내게 주는 생애 마지막 개근상을 받는 날이 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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