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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Jan 05. 2023

유정란氏

 동네 병원에 가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내 먼저 온 손님을 부른다. 유정란씨! 유정란씨!

 이름이 불린 ‘유정란’ 씨는 접수대로 다가가며 간호사에 ‘유정란이 아니고 윤정○ 이예요’라고 말한다. 차례를 기다리며 멍하니 있던 내게, ‘윤정○’씨보다는 ‘유정란’이라는 이름이 크게 들리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라는 생각이 쓰윽 지나간다.


 생각이 쓱 하고 지나간 자리 뒤에, 대학 시절 가끔 고향을 오가는 완행열차에서 만난 여자가 갑자기 머릿속을 비집고 나온다. 열차에서 옆에 앉은 인연에, 갑자기 연정(?)이 끓어오른 나의 무작정 돌진에 과녁이 되었던 여자. 열차 안에서의 몇 시간의 돌진과 정성을 다한 보챔으로, 기어이 그해 봄 축제에 동행까지는 이루었으나 결국은 스쳐 가버린 여자. 그 시절의 일기장을 날마다 채웠던 여자 ‘Y’. ‘유정란’ 씨와 비슷한 이름의 그녀가 왜 갑자기 떠오르는지?

     

 ‘유정란’이라는 이름에서 ‘Y’의 이름이 떠오르며 또 다른 이름이 파노라마처럼 순간을 스쳐 간다. 묻혀있던 이름들의 첫 자락이 삐져나오니 그 뒤에 숨어 있던 이름들도 줄지어 떠오른다.

      

 친구와 같이하는 자취방에 사과 반쪽을 가지고 들어와서는 오랜 시간 조잘대던 옆방의 여자 자취생. 내가 아닌 나의 룸메이트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녀가 졸업으로 먼저 떠난 한참 뒤, ‘가만히 누우면 다가오는 얼굴이 있다’로 시작하는 연서를 보내와 나를 당황케 했던 여자. 여성에게서 처음 받아보던 연서에 며칠을 끙끙대다가, 딴청 부리듯 친구들과 여행 갔던 이야기만을 길게 써 보내어 미안했던 여자. ‘L’

     

 친구의 소개로 미래를 생각하며 진지하게 만났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여자. 그녀를 감당할 미래에 대한 자신이 없어 의도적으로 멀리한 일 년 반 후, 뒤늦게 몰려온 그리움이 사무쳤던 어느 가을 늦은 밤, 그녀의 자취방 주인댁으로 밤늦은 전화를 했을 때, “너무 늦게 전화하셨네요.”라는 낮은 목소리의 한마디를 들었을 때도 “밤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전화하겠소.”라고 답하며 그녀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던 우둔한 나. 공교롭게도 다음 날 아침에 도착한 편지에서 ‘오래 기다리다가 다른 인연과 결혼한다’라는 글이 눈에 들어오고서야 ‘너무 늦게 전화하셨네요’의 의미를 그제야 알았던 미련한 나에게 희미한 흔적으로 남은 이름. ‘K’

     

 ‘유정란’이라는 이름에서 젊은 날에 스쳐 간 인연들이 겨울바람같이 쌩하고 지나간다. 그러면 당최 ‘유정란’ 씨는 누구지, 또 어디서 알았던 이름인가를 갸웃갸웃하는 순간, 아내의 말이 떠오르며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달걀은 다른 것 사지 말고반드시 유정란(有精卵)’으로 사 오세요.‘

     

 쯧쯧.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이더라니. ’유정란’ 씨는 먹거리에 관해서는 ‘식품의약안전처장‘급으로 까다로운 아내가 매일 내게 심부름시키는 달걀의 한 종류였다.

      

(이름을 잘 못 불러 젊은 날 나의 애정의 역사를 다시 펼쳐 준 간호사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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