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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Dec 31. 2022

안경을 바꾸다

 몇 년을 사용한 안경을 바꾸었다. 너무 오래 썼다. 벌써 한참 전부터 시야가 흐릿해지고 좀 불편함을 느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바꾼 것이다. 고도 근시라서, 목욕탕에서도 안경을 사용하고, 마스크 때문에 서리는 김을 방어하고자 렌즈에 비누칠을 자주 한 탓에 코팅에 손상이 많이 가서 흐려진 탓이다.

    

 갑자기 바뀐 안경에 세상이 환해졌다. 원래 세상이 이렇게 밝았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런데 문제는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이 다 좋은 것만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었다. 

 타고난 바탕이 없는 얼굴, 아내 말을 빌리자면 ’시커먼 뿔딱 농군‘같은 얼굴이지만 ’흠, 이 정도면 아주 빠지는 얼굴은 아니지‘하며 나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녔다. 그런 자신감은, 더러 들어온 '동안(童顏)'이라는 칭찬에 미혹되어 왔고, 어쩐 사유인지 청년기에는 지랄성(?) 피부였는데, 오히려 나이가 들어가면서 피부 좋다는 말도 자주 들었기에, 거울을 볼 때마다 ’맞아. 좀 동안이긴 하네, 피부도 그럭저럭 매끈하구먼. ‘라며 남이 주는 칭찬을 거울에 보이는 모습으로 증명하며 살아왔다. (물론, 동안이니 피부 좋다는 말은 평가가 곤란한 얼굴에 뭐라도 칭찬 한마디를 해야 할 때 상대가 고육지책으로 생각해낸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모른 체하는 것이다.)


 그런데 새 안경을 착용하고 엇! 이게 뭐야, 하고 깜짝 놀랐다. 어떤 낯선 얼굴이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피부가 좋다는 얼굴 본바탕에는 사춘기 시절의 여드름 자국, 세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이런저런 생채기의 잔재, 보일 듯 말 듯 한 무수한 점, 동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약간의 주름 등의 흔적들이 덕지덕지 군데군데 파편같이 박혀있고 복병같이 숨어 있었는데, 새 안경 덕에 그것들이 선명하고도 분연하게 떨쳐 일어난 것이다. 아내와 딸내미는 전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구먼 ‘ 했지만 나는 거의 경악할 지경이었다.

      

 이랬단 말인가 내 얼굴이.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흐려진 안경 덕에, 남들이 보는 얼굴은 매양 똑같은데, 나는 상처와 주름을 못 보고 당당하게 살아온 것이다. 그렇다. 그동안 나의 얼굴을 스스로 ’ 뽀샵‘하고 살아온 것이었다. 모르고, 또는 눈감고 지내는 것이 좋을 것들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에 옛날 안경을 다시 쓸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또 한 해가 지나간다. 

 새해라는 의미를 부여하지만, 시간은 아날로그이다. 디지털이 아니다. 순간은 있을지라도 끊어짐이 없는 아날로그이다. 어느 스님은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라고 했다. 이런 아날로그의 시간에 굳이 한 줄을 그어 구분하고자 하는 것은, 새 희망을 품고 싶은 이유일 것이다.     


 새해에는 바뀐 안경에 비치는 세상처럼 더 밝고 환해진 세상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하지만 새 안경에 비친 세상은 또렷하더라도, 마음은 좀 흐릿하고 너그럽게 세상과 사람을 바라봐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아직도 투덜거리고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것을 누르며 살자고 다잡으면서도 그러지 못하고 있기에….   


그런데 많이 아쉽다. 세상은 잘 보이고 내 얼굴만은 전처럼 ’뽀샵‘된 매끈한 얼굴을 보여주는 그런 안경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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