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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Jan 13. 2023

안동을 위한 변명

 몇 년 전부터 ‘시껍했다.‘ 또는 ’시껍먹었다.’라는 말이 자주 예능프로그램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그전에는 내 고향 안동 지방에서만 자주 사용하는 말이었다. TV 자막에서 처음으로 그 단어를 보고는 웬 사투리를, 하고 생각했지만, 사전을 찾아보니, 겁(怯}을 먹다(食)는 의미의 식겁(食怯)에서 나온 엄연한 표준말이었다, 고향에서만 자주 사용했고, 그 어감이 또한 매우 토속적이라 당연히 사투리라고 생각했었다. 겁을 먹었다는 말이 식겁이라 이야기하다가 ‘시껍’이 된 모양인데, 사전에는 식겁‘과 ’시껍‘이 좀 다른 뜻으로 해석되어 있으나, 식겁에서 시껍이 나온 것은 분명한 듯하다.

     

 조선 중기 이후 중앙정권에서 멀어져 학문에만 몰두하던 남인들의 중심지, 안동은 유독 양반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그것을 지키고자 했으며, 따라서 무슨 말이든지 한자로 쓰는 버릇이 몇십 년 전에도 많이 남아 있었다. 나쁘게 보면, 식자(識者)인 체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좋게 보면 학문-그 당시에는 성리학만이 학문이었으므로-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이 아닐까 한다.

     

 어릴 때 사용되었던 이런 유사한 말들이 많이 있었는데 커가면서 잃어버렸다가 어쩌다 한두 개씩 생각이 나곤 한다. 시골 큰댁에 가면 어른들이 파리, 모기를 탁 치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요놈의 문승들이.!!’ ‘문승‘은 ’모기 문(蚊)’ ’파리 승(蠅)’의 한자어이다. 또 백부님은 아침이면, ’이제 일어나 소세해라 ‘라고 하셨는데, 소세는 빗소(梳), 씻을 세(洗)이니 세수하고 머리 빗으라는 뜻이며, 옛 선비들이 단정한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이다. 그래도 이 말들은 사전에 나오기는 한다. 

또 어린아이가 서럽게 크게 엉엉 우는 것을 보면 ’고상천하며 운다’라고 했다. 특히 어머니께서 종종 쓰시던 말이었는데,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이 단어는 ‘高上天’, 즉 하늘을 쳐다보며 우는 모습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보면 안동 문화권 사람들의 식자인 체하는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런 정도이니 아래와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안동에 있는 ‘임하면’이라는 지역에 공립(公立)으로 소학교(小學校)가 설립되었으니, 학교명이 ‘임하 공립소학교’였다. 촌로가 이 학교 이름을 보고 해석하기를, ‘임하공(臨河公)이 세운(立) 소학교(小學校)로구나.’ 즉 임하공이라는 분이 세운 소학교라고 해석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래도 이것은 말이 되기는 된다.

      

 어느 날, 누님이 안동댐에 갔다가 목격한 실제 이야기다. 76년에 안동댐이 완공되었다. 그때는 그 정도의 국가시설은 뉴스와 전국적 이슈였고, 대통령도 참석한 준공식이었다. 당시 건설부 장관이 김재규였고,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경과보고를 했으니 참으로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그 이후 안동댐은 딱히 갈데없는 소도시시민들이 수시로 가던 공원이자 휴식처였다. 지금도 그런 역할을 하는 줄 짐작하고 있다. 

안동댐 입구에, 댐 건설의 시행주제인 ‘산업기지개발공사(産業基地開發工事)’라는 표지판이 있었는데, 놀러 나오신 촌로 두 분이 그것을 이렇게 읽고 있었다고 한다. ‘사공발(事工發)하니 개지기(開地基) 업산(業産)이라!’ 거꾸로 읽은 거였다. 그래 놓고는 이게 무슨 뜻인고? 하며 갸우뚱 서 계시더란다. 한문에 익숙한 촌로들이니 왼쪽으로 읽는 것에 습관이 되었기에 그렇게 읽었을 것이다.

     

이렇게 안동사람들은 식자인 체하기를 즐겼으니, 시인 ‘유안진’은 ‘안동’이라는 시에서 ‘비도 글 읽듯이 내려오시며 바람도 한 수 읊어 지나가시고 동네 개들 덩달아 댓귀 받듯 짖는 소리‘, 라며 안동문화를 표현했다, 오죽하면 동네 개들도 대귀 받듯 짖는다고 했을까.

     

오래전 대구에서 살 때, 안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대문이 세워졌다. 완전 전통 기법의 문은 아니었으나, 제법 웅장한 문의 이름은 남례문(南禮門)이었다. 그러다 얼마 뒤 서쪽에 비슷한 문이 세워지더니 서의문(西義門)이라는 이름의 현판이 붙어 있었다. 이 정도에서 아하, 동서남북에 사대문을 만들고 각각의 이름은 東西南北과 仁義禮智에서 한 글자씩 따서 사대문을 만들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동쪽에 문이 서더니 동인문(東仁門)이었다. 나의 똑똑함(?)에 내심 뿌듯했고, 그럼 북쪽의 문은 북지문(北智門)이겠구나 했다. 북쪽의 문은 관광단지를 개발한 지역에 세우느라 한참 뒤에 세워졌는데,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그 문의 이름은 신독문(愼獨門)이었다. 어감 탓인지, 아니면 북쪽은 임금이 있는 쪽이라 신성시하여 ’북(北)‘이라는 글자를 일부러 회피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신독‘의 뜻만을 보면 역시 안동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독((愼獨),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간다는 뜻이다.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도시를 표현했던 바대로 역시 안동이다. ’신독‘의 뜻대로 온 세상 사람들이 산다면 얼마나 좋은 세상일 될 것인가.

     

안동사람들이 목소리가 크고 논쟁적이며 식자인 체하는 것, 이런 것은 결국 학문을 숭상하고 염치와 선비의 기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 무수한 선비들이 나라를 위해 일어서고 목숨과 재산을 바쳤다. 그리하여 안동을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하는 것에 전국 어느 도시도, 사람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향을 갈 때마다, 사람들이 갈수록 급하고, 공중질서도 많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안타깝다. 실제 그런 것인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리 보이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더러 들려오는 험한 사건들은 사람 사는 동네라면 어디서나 발생하는 것이지만, 고향에서의 그런 소식은 유독 마음이 아프고 우울하게 한다. 무항산이면 무항심이라고 했듯이, 산업이 정체되고 생산이 줄어들고 삶이 팍팍해져서 그러해지는 것일까?

     

그러나, 유안진 시인은 ‘서릿발 붓끝이 제 몫을 알아 염치가 법규를 앞서던 곳’이라 했으며, ‘아직도 안동이라 마지막 자존심 왜 아니겠는가’라고 했으니, 영원히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기를 바랄 뿐이다.

               


안동(安東) / 유안진

어제의 햇빛으로 오늘이 익는

여기는 안동

과거로서 현재를 대접하는 곳

서릿발 붓끝이 제 몫을 알아

염치가 법규를 앞서던 곳

옛 진실에 너무 집착하느라

새 진실에는 낭패하기 일쑤긴 하지만

불편한 옛것들도 편하게 섬겨가며

참말로 저마다 제 몫을 하는 곳

눈비도 글 읽듯이 내려오시며

바람도 한 수 읊어 지나 가시고

동네 개들 덩달아 댓귀 받듯 짖는 소리

아직도 안동이라

마지막 자존심 왜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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