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팀에서 연락이 왔다. 발주처가 현장에서 시운전 수행 계획 (Commissioning Execution Plan)을 발표해 달라고 한 것이었다. 이전 발표가 부족한 점도 많았고 현장에서 많은 발주처 인원들이 듣기를 원했던 것 같았다. 묵묵히 시운전 준비를 해 나가던 우리 팀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때마침 매니저분도 새로 오셔서 같이 준비할 수 있었다. 이번 발표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지난번의 발표를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발표했던 자료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 어떤 내용을 추가할지, 어떤 부분을 삭제할지. 매니저님과 하루에도 몇 번씩 수정을 거듭하며 최종안을 도출하였다. 프로젝트를 어떻게 수행할 지에 대한 전략 소개를 시작으로 전체 프로젝트 스케줄, 각 기간별 수행해야 할 작업 설명, 조직도와 인력계획, 마지막으로 공장을 어떻게 돌릴 것인지에 대한 설명 (Startup Sequence)을 넣었다. 더 이상 손댈 필요 없는 만족스러운 발표자료가 완성되었다.
드디어 태국으로 출발할 날이 다가왔다. 떨리는 기분으로 공항에 도착했는데 매니저님과 부장님이 먼저 와 계셨다. 나도 늦게 온 게 아니었는데 두 분은 더 일찍 오신 거였다. 첫 현장을 왔다 갔다 할 때 비행기를 많이 탔지만 그래도 공항에 오면 항상 설레였다. 이번엔 다른 나라여서 그런가. 그것도 태국. 다른 사람들은 여행으로 가는데 나는 일로 가니 더 기분이 이상했다.
줄을 서고 표를 받으려고 하는데 매니저님이 모닝컴이어서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일행 모두. 이게 무슨 횡재인가. 그 비싼 비즈니스를 돈 한 푼 안 들이고 탈 수 있다니. 어안이 벙벙했지만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번 출장, 아니 이번 프로젝트는 나에게 큰 행운을 안겨다 줄 것만 같았다.
일회용 그릇이 아닌 사기그릇에 식사가 나오고 두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정말 편안하게 태국에 도착했다. ‘비행기 탈 때마다 비즈니스 타고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이 생각뿐이었다. 생애 첫 태국은 후덥지근한 날씨와 습한 바람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나오자마자 '헉' 하는 소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만큼 숨 쉬기가 힘들었다. 이제 이런 날씨에 적응해야 했다.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현장으로 출발. 태국 수완나품 공항에서 현장까지는 차로 2시간 정도 가야 했다. 난생처음 보는 태국의 풍경은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특히 야자수로 펼쳐져 있는 가로수는 내가 태국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만들어 주었다.
현장에 도착해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조립식 건물로 만든 사무실에 책상과 의자가 쭉 늘어서 있는 모습. 사우디에서 일했던 곳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태국이라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일하는 곳은 역시나 변함이 없었다. 제일 먼저 PD (Project Director)분께 인사를 드리고 사무실에 계신 분들께 돌아다니며 인사를 드렸다. 본사에서부터 같이 일했던 분들도 계시고 처음 보는 분들도 계셨다. 나중에 다 같이 일할 분들이기에 인사를 하면서 얼굴을 익혔다. 시운전은 다른 부서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현장에 계신 모든 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앞으로 일을 해결해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된다.
발표날.
많은 발주처 인원들이 우리 사무실 대회의실에 모였다. 지난번 한국에서의 미팅과 출장 때 만났던 분도 계셨지만 대부분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공장이 다 지어지면 이 공장을 운영할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이었다. 한 명 한 명 모두 인사를 나눈 후 발표가 시작되었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와 중간중간 발주처와 눈을 맞추며 발표하는 매니저님의 모습이 멋있게 느껴졌다. 이런 모습은 발주처에게 신뢰를 줄 수 있고 그 신뢰는 앞으로 일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기였다. 박수 소리와 함께 발표가 끝났고 여기저기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도 막힘없이 대답하셨고 발주처의 궁금증이 해결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매니저님도 발주처 앞에서의 발표는 처음이었다. 이 첫 발표에서 발주처에게 신뢰를 안겨주고 좋은 인상을 심어 준 것 자체가 큰 수확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발주처는 하루라도 빨리 시운전 팀이 현장에 상주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기에 현장에 나가있는 것은 시운전 팀 입장에서 보면 좋은 일이 아니다. 시운전 일이 없는 상태로 현장에 있게 되면 다른 일을 하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로젝트 비용 측면에서도 좋은 일이 아니다. 발주처에게 시운전 팀의 파견 일정을 설명하고 모든 회의를 마쳤다.
태국 현장의 맛을 본 시간. 첫 프로젝트였던 사우디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고, 발주처도 친절하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앞으로 이곳에 얼마나 있게 될지 모르겠지만 사우디에서 일했을 때보다는 발주처와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해야 할 일을 잘 끝냈다는 안도감이 우리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