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훈은 없고, 현실만 있다

by 루나

1. 강아지


그날 우리는 집 근처 쇼핑몰을 구경하기로 했다.

어떤 가게 쇼윈도우에서 하얗고 예쁜 비숑 강아지 한 마리를 봤다. 딱히 귀엽게 애교를 부리지도 않았고 우리를 부른 것도 아닌데 거기서 발이 멈췄다. 우리는 미끄러지듯 스르르 그대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2. 가방


가방 가게였다.

인조가죽인데 이상하게 손이 계속 갔다. 가죽질감은 부드러웠고, 세련된 디자인에 사이즈도 적당했다. 무엇보다 가벼웠다. 칼라도 과하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찾던 데일리백으로 안성맞춤 가방이었다.


3. 여사장


그때 여자가 나타났다.

큰가슴과 얇은 팔뚝이 노출된 화려한 차림, 지나치게 성형으로 정돈된 얼굴. 분명 예쁘긴 한데 부담스러운 모습이었다. 말투는 저렴했고 웃음은 필요이상으로 크고 과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친절한 응대가 살짝 편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우리를 큰 거울 앞으로 안내하며 가방을 하나씩 들어보게했다.


4. 흰머리 남자


팔과 손에 타투가 가득하고 머리는 흰색으로 탈색한 남자가 지갑을 내밀며 꽤 좋은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설명은 열심인데, 손이 너무 바빠 보였다. 우리는 지갑은 사지 않았지만 각각 가방을 두개씩 사들고 매우 흡족해했다.


5. 폐업


몇 달 뒤 그 앞을 혼자 다시 지났다.

간판은 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안은 엉망이었다. 누군가 급하게 떠난 흔적 같은 느낌. 가방은 잘 쓰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쉬움이 있었다.


6. 라이브 방송


그 간판이름으로 SNS를 찾아봤다. 그 여자 얼굴이 그대로 있었고 그녀는 흰머리 남자와 함께 라이브 방송 중이었다. 가방을 팔고 있었는데 가격은 내가 산 것의 3분의 1. 말도 안 되게 싸서, 의심 대신 욕심이 먼저 나왔다. 나는 생각도 할것없이 가방 세 개를 주문했다.


7. 미배송


바로 택배가 왔다. 그런데, 가방이 두 개였다. 하나가 없었다. 카톡을 했다. 이틀동안 읽씹.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목소리가 걸걸한 흰머리남자였다. “곧 보내겠다.” 이번에는 2주일이 지났다. 전화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이번에는 한달이 지났다. 다시 전화했다. 흰머리남자는 말했다.

“지금 몇 백만 원짜리 악어백 거래 중인데요.

이 정도 가격 가방 가지고 왜 이렇게 전화하세요? 돈 다시 돌려드리면 되잖아요.” 순간 나는 미안합니다... 기다리겠다는 말 외에는 할수가 없었다.


8. 해장국집


며칠 뒤, 성당 주일미사후 동네 해장국집 앞을 지나는데 타투 가득한 손으로 이를 쑤시며 해장국집을 나오는 흰머리남자를 발견했다. 해장국집을 나오자마자 시원하게 카악~하며 침을 뱉는다. 그 뒤를 이어 성형미인 여사장도 이를 쑤시며 나오신다. 그들은 그옆 골목으로 돌아간다. 서로에게 불을 당기며 사이좋게 담뱃불을 붙여준다. 나는 그 장면이 너무 완벽(?)해서 잠시 멈춰 섰다. 어쩐지 가방은 포기해야할것같았다.


9. 마지막 전화


한 달쯤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가방 가게 직원이라고 했다. 장부를 정리하다 보니 가방 하나가 아직 배송되지 않은 게 발견됐다고 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며, 본인 재량으로 가방 하나를 더 넣어 보내드리겠다고했다. 다음 날 택배가 도착했다. 상자 안에는 가방 두 개, 스카프 두 개, 액세서리 몇 개가 들어 있었다.


10. 정상 영업


그들은 여전히 라이브 방송으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유난히 요란하고 과장된 웃음, 값싸 보이는 친절함으로 오늘도 소리를 지르며 팔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다음 라이브 알림을 끄지 않았다.




+++ 알면서도 속고,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지켜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음 장면을 기다리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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