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 싶은 직업을 자동차 산업으로 선택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인 1980년도이다. 1980년은 우리 현대사의 가슴 아픈 사건을 기록한 해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모든 대학은 휴교에 들어갔다. 마침 징집을 위한 신체검사 통지서가 왔다. 신체검사는 본적지에서 시행함으로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학교는 휴교령으로 문을 닫았으니 오랜만에 고향 친구도 만날 겸 며칠 여유 있게 도착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마을에서 놀고 있었다. 중・고등학교도 휴교령이 내렸나. 궁금한 생각에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너희들 왜 학교에 가지 않고 마을에서 놀고 있니. 즉시 돌아오는 대답은 버스가 오지 않아서 학교에 갈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사연은 이렇다, 나는 1년 365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6㎞의 산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대구로 이사한 이후 새마을 운동으로 도로가 만들어졌다. 도로를 따라 버스 운행을 시작하자 마을 아이들은 편리하게 등하교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은 비포장도로여서 비가 오면 운행을 하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예전에는 6㎞의 산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는데, 이 아이들은 걸어서는 등교를 하지 못하는구나 싶었다. 문명의 발전이 아이들 삶의 형태까지 바꾸어 버렸다는 생각에 씁쓸했다. 그 먼 길을 걸어 중학교에 다녔고 초등학교 6년 개근을 했던 나로서는 학교를 결석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이날의 사건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평범한 재능을 가진 나는 상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러나 지금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상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국민학교(초등학교) 6년 개근상이다. 초등학교 6년 개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2학년 때 어머니는 홍역을 앓고 있는 나를 등에 업고 2㎞를 걸어 학교에 가셨다. 선생님이 출석한 학생들을 확인하고 나면 나를 등에 업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 의학적으로 올바른 일이었는가 하는 부정적인 의견이 있을 것이다. 다만 어머니는 나에게 성실함을 가르쳐 주고 싶지 않으셨을까 생각한다. 이 교훈은 내가 살아가는 평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어머니의 이러한 가르침은 학교 졸업 후 직장 생활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교육을 받고 성장한 나로서는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다고 학교를 결석하는 광경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당시, 앞으로 자동차 산업의 성장성이 엄청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우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새마을 운동 등으로 국민소득 1만 불의 선진국 진입을 꿈꾸었다. 선진국이던 미국, 일본 등은 가구당 승용차가 2대, 1.5대 등의 통계적인 자료로 교육을 받았기에 우리도 선진국이 되면 대부분의 가정이 자가용을 가지는 시절이 올 것이라 예견했다. 지금의 속도로 경제 성장을 이룩하면 나도 30대 중반이 되면 자가용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실 1980년에만 해도 자가용 승용차를 보유한 가구는 매우 드문 사례였지만 말이다.
그 당시 살았던 대구는 섬유산업이 중심인 도시였다. 옆집의 아저씨는 일거리가 있으면 출근을 해서 월급을 받아오고 일거리가 없으면 집에서 쉬는 매우 불완전한 생활을 했다. 이러한 모습을 자주 보아온 나로서는 앞으로 계속 성장의 가능성이 큰 자동차 산업이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면 자동차 산업 분야에서 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 자신의 성장과 생활의 안정을 위하여.
대학교 2학년 청년, 이범수의 미래를 바라보는 전망은 아주 정확했다. 자동차 산업은 날로 성장을 하였고, 30대 초반이 되던 1992년 드디어 자가용 승용차를 갖게 되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있다. 이렇게 정확하게 10년 후를 예측했는데 이러한 정확성을 가지고 타이어 수리점이라도 나의 사업을 시작했으면 엄청난 사업가가 되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이다. 하지만 자동차 회사에 입사한 것은 성장 산업에 한 일원으로 참여하고 싶은 것과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고자 함이 목적이었다.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목적으로 지원한 자동차 산업은 대량 생산 체제의 산업이며 기획에서 생산까지의 개발 과정과 개발 제품의 품질 및 성능을 검증하는 과정과 절차가 매우 엄격하고 높은 수준의 표준 정립이 필요한 산업이었다. APQP(Advanced Product Quality Planning)로 대표되는 자동차의 신제품 개발 절차와 기법은 자동차 산업을 떠나 일반 산업에서 일을 하게 된 나에게 매우 큰 힘이 되었다. 나는 간혹 혼자서 이런 가정을 해본다. 내가 첫 직장으로 자동차 산업 분야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결코 현재의 나의 모습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능력보다 중요한 것이 내가 첫 일을 자동차 산업에서 시작한 선택이 나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생각한다.
자동차 산업은 매우 엄격하고 조직적이다. 2~3만 개의 부품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각자의 기능이 완벽하게 구현되어야 하고 다양한 사용자, 다양한 환경에서 차질 없이 실행되어야 한다. 물론 안전의 기준은 항공기가 훨씬 엄격할 것이다. 그런데 항공기 산업 분야의 전문가와 일해보니 너무 안전에 치우쳐 있어 생산성을 좀 더 세심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국내의 항공 산업 규모상 대량 생산에 대한 대처가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가전제품 전문가는 양산과 시장의 변화 속도에 대해서는 매우 기민하게 대처하는데, 제품이 사람에게 미치는 안전과는 긴밀함의 정도가 자동차처럼 엄격하지는 않은 일도 있었다. 그 때문에 자동차 산업에서 배운 여러 특성은 여타 일반 산업에 적용했을 때 무리 없이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평범한 우리들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방송하는 ‘인간 시대’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방송한 내용인데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다. 시계 수리점을 하는 분의 사연이다. 시계 수리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이분이 수리한 시계의 품질은 5년 동안 보증한다고 한다. 참고로 명품 메이커에서의 신제품 품질 보증은 3년이다. 당연히 기능 올림픽에서도 아주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고 한다. 정말로 놀라운 기술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아날로그 시계를 사용하는 사람이 급격히 줄어든 관계로 시계를 수리하러 오는 손님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뛰어난 기술을 가진 분인데도 남대문 시장 앞 도로변 버스 토큰 판매 점포 안에서 버스 토큰 판매와 시계 수리점을 병행하고 계셨다. 당시 프로그램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분이 시계 수리가 아니고 비행기 수리를 시작했다면, 원자로 수리를 시작했다면, 자동차 수리를 시작했다면 지금 저분의 위치가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결코 버스 토큰 판매를 병행한 수익으로 생계의 도움을 받는 생활은 아닐 텐데. 선택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