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여행 준비는 설렘과 긴장감 속에서 진행되었다. 대금 연주 준비도, 여행 코스 계획도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다르다. 오늘은 비통한 마음으로 특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바로 Mr. René BILLET의 유골 앞에 올릴 책과 번역본을 준비하는 것이다.
책장을 넘기며 그분과의 추억이 담긴 페이지들을 다시 읽어본다. 첫 번째 저서에 담아둔 그분과의 소중했던 기억들이 새삼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분을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과거 Valeo 동료들을 통해 그분의 안부를 확인하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약 10여 년 전에 뇌종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 그리고 유골은 집에 보관 중이라는 말. 그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Mr. René BILLET과의 만남은 내가 Amiens 공장에서 Project 수행을 위해서 잠시 근무할 때였다. 그는 Valeo 본사에서 약 150km 떨어진 Amiens 공장의 나의 사무실로 매주 목요일마다 방문했다. 그 거리를 매주 마다하지 않고 오신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웠는데,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의 일에 대한 자세였다. Amiens 공장에 도착하면 항상 생산기술 팀장과 함께 나의 사무실에 와서 하루 종일 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정말 세부적인 것까지 깊이 있게 질문을하고 방향성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분의 질문은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다. 프로젝트의 본질을 파악하고, 문제점을 찾아내고,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는 질문들이었다.
나는 그분의 질문에 50%는 즉석에서 대답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50%는 한 주간 공부해서 다음 주에 답해야 하는 숙제였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얼마나 깊이 있게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더 알아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Amiens에 있는 6개월 동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목요일은 나의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이 그분의 일정이었다. 그 성실함과 헌신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은 단순한 상사가 아니었다. 진정한 스승이었다. 생산, 설계, 생산기술, 공무, 영업, 구매 등 제조회사의 모든 업무를 경험하고 현재는 Valeo Clutch Group의 Technical Vice President로 일하고 있는 그분의 경험은 실로 방대했다. 그런 그분의 경험과 현직 생산기술팀장이 함께 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모든 예상 문제점과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도움 덕분에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프로젝트로 완성할 수 있었다.
나는 첫 번째 회사에 입사 후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했다. 항상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었고,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지겨웠기에 같은 업무를 약 3년 정도 하고는 다른 부서로 이동했다. 이런 나의 특성 때문에 일을 폭넓게 경험할 수 있었지만, 깊이 있게 일하는 법을 배우지는 못했다. 그런 나에게 깊이 있게 일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분이 바로 Mr. René BILLET이었다. 그분은 단순히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의 본질을 파악하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분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매일 아침 호텔에서의 픽업은 내가 담당했다. 오가는 차 안에서 나의 지난 경험을 쭉 들어보고는 원가에 대한 경험을 좀 더 심도 있게 할 수 있는 부서로 가서 일해보라고 조언했다. 내가 경영자로 가기 위해서는 그 부분이 필요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 조언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분은 내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주신 것이었다. 단순한 업무 조언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혜안이었다.
2003년 나에게 원가를 깊이 경험할 기회가 왔다. 갑자기 구매 총 책임자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그때 나는 TPS(Toyota Production System)에 엄청난 매력을 느끼고 TPS에 깊숙히 빠져 있을 때의 갑작스러운 인사 이동이었다. TPS와 Mr. BILLET의 조언 사이에서 한창 갈등하고 있을 때, 몇 년 전 모시다 퇴사한 상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범수야, 이제 너하고 나하고 인생 2막을 설계해보자." 이 말을 듣는 순간 회사 전체 자재,설비등 모든 구매비용으로 집행하는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는 나로서는 이러한 물질적 유혹에서 자유롭게 생활한다는 것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TPS를 계속 공부하고 현장에 적용하는 일을 하기 위하여 나의 첫 일터인 평화 Valeo를 퇴사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퇴사한 것은 아주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퇴사를 했기에 Parker Hannifin이라는 좋은 회사를 만나서 많은 일을 했고, 그 덕분에 퇴직 후에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Mr. BILLET의 조언이 직접적인 경로는 아니었지만, 그분이 심어주신 깊이 있는 사고와 원칙이 나의 결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 책에 Mr. René BILLET와의 고마웠던 기억들을 글로 남겼다. 그때만 해도 언젠가는 그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퇴직 직후인 2023년 여름 프랑스 여행을 계획했으나 사모님과의 일정이 맞지 않아서 가지 못했고, 2024년은 사고로 여행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는 꼭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모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지망 마음은 너무 무겁다. 더 가슴 아픈 소식도 있었다. 사모님과는 소통이 언어적인 이유로 동료 통하여 사모님과의 연락을 하고있는데 사모님에게서도 회신이 없다.동료의 이야기는 사모님도 돌아가셨을 수도 있다는 가슴 아픈 대답만 돌아왔다. Google Map을 통하여 확인한 집은 아직도 그 옛날 모습 그대로인데, 사모님까지 변고가 있다면 너무나 슬프다. 남들이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소유권은 Mr. BILLET의 가족들에게 있는 것 같다. Mr. BILLET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따뜻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사모님의 친절한 미소와 정성스러운 대접.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렸다는 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집을 방문하고 사모님을 만나지 못하면 책과 Mr. René BILLET 부분은 Google 번역을 통한 프랑스어로 번역된 부분을 두고 올 계획이다. 혹시 집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 안쪽에 두고 와야 할 일에 대비하여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방수 작업까지 오늘 마쳤다. 번역 작업을 하면서 그분과의 추억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았다. 한국어로 쓰인 감사의 마음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분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매주 목요일 사무실에서 나누던 진지한 대화들, 차 안에서 해주시던 따뜻한 조언들이 모두 되살아났다.
Mr. René BILLET은 단순히 직장 상사가 아니었다. 인생의 스승이었고, 나의 성장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해주신 분이었다. 그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분이 가르쳐주신 깊이 있는 사고, 원칙에 대한 고민, 그리고 진정한 리더십에 대한 이해는 내 인생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늦었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그분에게 마지막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정말로 나의 성장을 위하여 큰 도움을 주신 분에게 감사를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하지만 그분이 내게 남겨주신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감사의 표현일 것이다.
Mr. René BILLET,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이제서야 찾아뵙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부사장님이 남겨주신 가르침은 제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 땅에서 선생님을 그리며, 마지막 인사를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