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3일차 - 파리에서 배운 것들

by 이 범수

새로운 교통수단과의 만남

오늘 아침, 가하철 역사에서 Navigo 카드를 구입했다. 그 작은 플라스틱 카드를 손에 쥐는 순간, 마치 파리라는 거대한 도시의 열쇠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파리를 여행할 때마다 지하철만 고집했던 내게, 호텔 직원은 눈을 반짝이며 버스 이용을 강력히 권했다. "버스를 타시면 시내 구경도 하실 수 있어요. 파리의 진짜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의 말에는 자신의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사실 파리의 지하철 시스템은 정말 놀랍다. 수백 년의 역사가 쌓인 도시 위에 워낙 촘촘하게 노선이 깔려있고, 표준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누구나 한 번만 설명을 들으면 쉽게 이용할 수 있다. 문득 20여 년 전 대구 지하철 1호선이 개통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불편함을 느낀 나는 밤늦게까지 시청에 보낼 이메일을 정성스럽게 작성했다. 파리에서 경험한 대중교통의 편리함을 우리 도시에도 적용해보자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교통과에서 전화까지 와서 일부를 시행하기도 했지만, 몇 년 후 모두 철거해버렸다. 그 순간의 실망감이 지금도 생생하다. 철거한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그래서 40년 이상 대구에 살고 있는 나조차도 간혹 불편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파리의 거리에서 그때의 꿈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새삼 깨닫는다.

그동안 지하철만 고집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지하철은 전 노선이 한 장의 종이 위에 표시되어 있지만, 버스 노선 정보를 파악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Google Map이 그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해주었다. 기술의 힘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버스를 타보니 예상보다 훨씬 편리했다. 마치 파리의 지리를 완벽하게 알고있는 동료와 함께 가는 느낌이다. 지하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고, 이동하면서 파리의 거리를 구경할 수도 있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파리지앵들의 일상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흘러갔다.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들,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는 청년들... 이 모든 것이 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졌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소매치기 걱정이 싹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그 유명한 파리의 소매치기들과 몇 번의 나쁜 추억이 있는 나로서는, 이것만으로도 버스를 선택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지하철에서 항상 가방을 꽉 껴안고 있던 긴장된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문득 농담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버스 이용객이 늘어나면, 그 많던 파리의 소매치기 중 일부는 정말로 실직을 하거나 전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기술의 발전과 여행객들의 현명한 선택이 만들어낸 작은 변화라고 생각하니 뿌듯하기까지 했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마주한 현실과 희망

버스를 타고 쉽게 노트르담 성당에 도착했다. 화재 사건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어떤 모습일지 무척 궁금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장례미사가 거행되고 있어서 오후 2시 30분까지는 성당 안 입장이 통제되고 있었다. 성당 앞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설렘과 안타까움, 그리고 경외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외부를 둘러보며 현실을 마주했다. 아직도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그 아름다운 후면에는 타워크레인을 비롯한 많은 건축 설비들이 설치되어 있어서, 기대했던 웅장한 모습보다는 공사장의 모습이 더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것도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괴와 복원, 그 사이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850년 된 성당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성당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수많은 전쟁과 혁명, 그리고 이번 화재까지도 견뎌낸 이 건물이 갖는 의미를.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장인들이 이 성당을 되살리기 위해 온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퐁네프 다리에서의 작은 추억 만들기

다음 목적지인 피카소 미술관으로 가는 길에 아름다운 퐁네프 다리를 지나게 되었다. 이 다리에는 중간에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앉으니 뒤로는 에펠탑이 배경이 되어 정말 멋진 장면이 연출되었다. 순간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가방에서 대금을 꺼내는 내 손이 떨렸다. 이런 충동적인 행동을 언제 마지막으로 해봤을까? 젊은 시절의 나라면 주저 없이 했을 일을, 나이가 들면서 언제부터인가 망설이게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파리의 한복판에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한 즉석 연주를 하고 싶었다.

첫 곡이 연주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갔지만 몇몇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관심을 가져주었다. 어떤 할머니는 옅은 미소를 보냈고, 또 다른 청년은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기도 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음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소통의 언어인지를. 국경도, 언어의 장벽도 허물어버리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는 것을.

연주가 끝나자 몇몇 사람들이 보여준 작은 관심이 내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그 자리를 떠나면서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용기 있는 사람인 줄 몰랐어." 나도 몰랐다. 은퇴 후에야 비로소 발견하게 된 내 안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 순간이 오늘 여행의 작은 추억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피카소 미술관에서의 고군분투

피카소 미술관에 도착했을 때, 나는 각오를 다져야 했다. MBTI 검사에서 전형적인 T형으로 나오는 나에게 피카소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 시간이기 때문이다.

작품 앞에 서서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왜 사람들이 이런 작품에 감동하고 열광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나의 역량으로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외국어로 쓰인 시를 읽는 것 같았다. 분명 아름다운 의미가 담겨 있을 텐데, 나에게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기호들의 나열로만 보였다.

그만큼 그 시간은 나에게 엄청난 생각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시간이었다. 아내도 같은 심정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만 이상한 건 아니겠지?" 하는 위안을 서로에게서 찾았다.

우리는 두 시간 정도 관람했지만, 에너지 소비는 평소의 몇 배가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때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하나의 경험이라는 것을.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에 감동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 했고, 이해하지 못하면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여행에서 얻는 소중한 배움 중 하나라는 것을. 오히려 이런 경험이 나를 더 겸손하게 만든다.

기술 혁명에 대한 감사

미술관을 나와 근처 카페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다음 일정을 힘들지 않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세느강 유람선으로 정했다.

유람선 선착장으로 이동하는 것도 버스를 이용했다. Google의 도움으로 너무 쉽게 선착장 가는 버스와 정류장을 찾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기술 혁명에 감사드리며, 이것을 꾸준히 사용하는 데 노력하지 않으면 남은 삶이 너무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AI 혁명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간혹 AI 도구를 사용하면서 느끼는 것은 "이게 가능하다고?"라는 감탄사뿐이다. 내가 현역으로 일할 때 이런 도구가 있었다면 몇 배의 성과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어주는 도구다. Asia Pacific Lean Manager로 일하던 시절, 매 분기 Operation meeting을 했다. 각 나라에 흩어져서 일하던 그룹 스태프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회의였다. 나도 이 회의에서 20분 정도 발표가 있었는데, 이 20분을 위해서 1주일은 출장도 가지 않고 사무실에서 어시스턴트와 매달려 구상하고 다듬었다. 그런데 불과 몇 분 만에 훨씬 멋진 자료를 만들어주는 기술이 너무 신기하다.

세느강에서 바라본 복원 중인 아름다움

선착장에 도착하니 마침 바로 출발하는 유람선에 좌석이 있었다. 우리는 티켓을 구입하고 최상층에서 세느강변의 풍경을 즐겼다.

내가 가장 기대했던 것은 유람선에서만 촬영이 가능한 노트르담 성당의 뒤쪽 모습이었다. 그런데 막상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아름다운 노트르담 성당의 뒷모습의 대부분을 복원공사중인 건축 시설물들이 감싸안고 있어서 나는 그 모습을 상상만해야 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과거의 아름다운 모습을 하루빨리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세느강변의 모습을 즐겼다. 때로는 완전하지 않은 모습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원 중인 성당의 모습에서 인간의 끈질긴 의지와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

유람선 위에서 바라본 파리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물 위에서 보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육지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세느강이라는 거대한 거울 위에 반사된 파리의 모습은 마치 꿈속의 도시 같았다. 강물 위를 스치는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고, 갈매기들이 유람선을 따라 날아다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무랑루즈의 화려한 밤

유람선 관광이 끝나고 우리는 이른 시간에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어제 잘못 알고 갔다가 돌아온 무랑루즈 관람을 위해서였다.

드디어 항상 바깥에서 구경만 하던 무랑루즈에 입장했다. 정확하게 9시가 되자 무대의 막이 오르고 엄청나게 화려한 쇼가 시작되었다. 90분 동안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달렸다. 얼마나 쇼에 몰입했는지 90분이 마치 잠깐의 순간처럼 흘러갔다.

한 번쯤은 꼭 봐야 할 훌륭한 쇼였다. 나이가 들어서야 처음 본 무랑루즈였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깊이 감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젊었을 때는 그저 화려함에만 눈이 갔을 텐데, 이제는 그 뒤에 숨은 예술가들의 노력과 정성, 그리고 130년이라는 오랜 전통을 이어가려는 의지까지 보였다.

무대 위에서 춤추는 댄서들의 표정 하나하나에서 프로페셔널의 품격이 느껴졌다. 그들의 몸짓에는 단순한 테크닉을 넘어선 혼이 담겨 있었다. 아마도 내가 젊었다면 그저 '멋있다', '화려하다'는 감상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들이 이 무대에 서기까지의 긴 여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수많은 연습과 좌절,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열정을.

무랑루즈라는 공간 자체도 감동적이었다. 이곳에서 툴루즈 로트렉이 그림을 그렸고, 에디트 피아프가 노래를 불렀으며, 수많은 예술가들이 꿈을 키웠다는 사실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나는 지금 그 역사 속의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작은 실수와 여행의 묘미

그런데 하나의 작은 문제가 남아있었다. 나의 착각으로 예약한 마들렌 성당의 음악 콘서트 취소 메일에 대한 회신이 아직도 없다. 포스터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하니 본인은 현장 발권 담당팀이라며 "인터넷 예매 취소는 인터넷 담당에게 전화하라"고 한다. 그런데 인터넷 담당의 전화번호는 없다.

이런 작은 실수들도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획대로 진행되는 여행보다는, 이런 예상치 못한 일들이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메일이 정확히 전달되어 취소가 잘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참 많은 것을 경험했다. 새로운 교통수단에 도전해보고,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과 마주하고, 기술의 발전에 감탄하고, 복원 중인 문화유산을 보며 인간의 의지를 느끼고, 화려한 공연에 감동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뽕네프 다리에서의 즉석 연주를 통해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는 열정을 확인했다.

은퇴 후의 여행은 젊었을 때와는 정말 다르다. 모든 것을 다 보고, 다 이해하려는 조급함보다는 내가 느끐는 것들을 차근차근 받아들이는 여유가 생겼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대로 두고, 감동받은 것은 마음 깊이 새기고, 불편한 것은 유머로 승화시키는 여행의 지혜를 조금씩 터득해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오늘은 '연결'이라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기술이 사람과 사람을,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방식. 음악이 서로 다른 문화의 사람들을 연결하는 방식. 그리고 시간이 과거와 현재를, 꿈과 현실을 연결하는 방식에 대해서 말이다.

호텔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파리의 밤이 깊어가고 있다. 내일은 또 어떤 새로운 경험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될까. 기대와 설렘, 그리고 오늘 하루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나이가 들수록 느끼는 것이지만, 여행의 진짜 의미는 새로운 곳을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만나는 것인 것 같다. 오늘 뽕네프 다리에서 대금을 꺼내 든 그 순간의 나처럼 말이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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