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5일차 - 오래된 나와의 약속을 지키다

by 이 범수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하루


여행 5일째 아침,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깼다. 오늘은 2년 전부터 계획해온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신 Mr. René Billet 부사장님의 집을 방문하여, 내가 정리한 "책밖으로 나온 이론,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책을 영전에 올리고 그동안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는 계획이었다.

사실 이 계획은 쉽지 않았다. 2년 전 첫 번째 여행을 계획할 때도 Mr. Daniel Maingaud를 통해 사모님과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실행하지 못했었다. 올해는 반드시 실행하겠다고 다짐하고 다시 연락을 시도했는데, 사모님에게서 회신이 없었다. 맹고의 마지막 소식은 사모님께도 무슨 변고가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올해 연세가 88세라는 소식이었다.

2년 전 끝까지 추진하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어렵게라도 그때 실행했어야 했는데, 시간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연락이 닿지 않더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집이 부사장님 가족 소유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책을 집에 두고 오기로 작정했다. 비를 맞아도 손상되지 않도록 비닐포장을 여러 겹으로 하고, 단단한 봉투에 넣어 꼼꼼히 준비했다.

렌터카와의 첫 만남

지금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했지만, 오늘은 렌터카를 이용하기로 했다. 렌터카 대여소에서 차를 받는 과정부터 익숙하지 않았다. 서류 확인, 차량 점검, 보험 관련 설명 등을 듣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작은 차를 선호해서 소형차를 예약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중대형 차량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미 예약된 차이니 그대로 받기로 했다. 차량 조작법을 간단히 설명 들었지만, 평소 운전하던 차와는 달라서 주차장에서 몇 번 연습해야 했다. 네비게이션 설정도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직원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다.

우여곡절 끝에 차를 완전히 인수하고 Billet 부사장님 집으로 향했다. 파리 시내를 벗어나면서 교통량이 줄어들자 운전이 한결 수월해졌다. 집은 샹틸리 성 근처의 조용한 주택가에 있다고 알고 있었다.

집은 샹틸리 성 근처의 조용한 주택가에 있었다. 대부분의 집들이 크고 웅장했다. 가는 내내 부사장님과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직업인으로서 나의 능력을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려 주시고, 경영자적 마인드를 넣어주신 분이었다.

24년 만의 재방문

샹틸리 성 근처에 도착하니 기억 속의 풍경이 펼쳐졌다. 큰 도로에서 주택가로 들어서자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집들이 크고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가는 동안 부사장님과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90년대 중반, 그분은 나에게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경영자적 시각을 갖도록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

집 앞에 도착했다. 집과 앞마당의 나무들은 24년 전 마지막 방문했을 때와 거의 변함이 없어 보였다.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담장 너머로 집안을 살펴보니 잔디밭은 여전히 관리가 잘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살고 있거나 적어도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문제는 초인종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봐도 벨이 보이지 않았다. 옆집으로 가서 벨을 눌러봤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마침 옆집에 택배 배달을 온 사람이 있어서 정보를 얻으려고 했지만, 프랑스어로 소통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우편함이 있어서 그곳에 넣어두면 비가 와도 안전하겠다는 안도감과 언젠가는 가족들에게 내 마음이 전달되겠다는 위안이 되었다.

기적 같은 만남

결국 만나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우편함이 집 앞에 있어서, 그곳에 책을 넣어두면 비가 와도 안전할 것 같았다. 언젠가는 가족들에게 내 마음이 전달되겠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책을 우편함에 넣으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집 안쪽에서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었다. 급히 달려가서 "Mr. René Billet를 아시나요?"라고 영어로 물었다. "나의 아버지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참을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나를 소개했다. 한국에서 온 이유와 부사장님과의 관계를 설명하자, 그분은 놀라며 집안으로 안내했다. 곧이어 사모님도 불편해 보이는 걸음으로 나오셨다. 연락이 닿지 않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직접 만날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영전에 올린 감사의 마음

집으로 들어가니 부사장님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들이 거실 곳곳에 놓여 있었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에서는 젊은 시절의 부사장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마음이 복잡해졌지만, 진정하고 사모님과 따님에게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가족들의 안내로 부사장님의 유골이 보관된 곳으로 갔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내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책밖으로 나온 이론, 현장에 답이 있다"를 올리고 깊이 인사했다. 이 책은 부사장님으로부터 배운 경영 철학과 현장 경험을 정리한 것이었다.

부사장님은 나의 직장 생활에 큰 전환점을 만들어주신 분이었다. 1994년 8월 도요타 자동차 방문이 내게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면, Mr. Billet은 나에게 전문 경영인의 길을 제시해주신 분이었다. 단순히 기술적인 업무만이 아니라 경영자적 마인드를 갖도록 이끌어주셨다.

내가 한국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따님도 한동안 조용히 듣더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나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는 모습이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의 배경

사모님의 상황을 듣고 나서야 오늘의 만남이 얼마나 우연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사모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평소에는 파리에 있는 병원에 다니기위하여 파리에 있는 따님의 집에서 지내신다고 했다. 샹틸리에 있는 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바로 어제밤이라고 하셨다. 만약 하루만 늦게 왔다면 만나지 못했을 뻔했다.

프랑스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나와 영어가 서툰 사모님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 따님이 미국에서 10년간 생활하다 돌아온 약학 박사여서, 따님을 통해 대화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두 시간 넘게 시간을 보냈다. 가족들이 준비해주신 간단한 차와 과자를 함께하며 부사장님에 대한 추억을 나누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줄 몰랐지만, 아직 갈 곳이 남아있어서 아쉬움을 남기고 집을 나서야 했다.


타이트해진 일정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일을 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많이 늦어진 시간 때문에 남은 일정이 빠듯해졌다.

애초 계획은 연락이 닿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책만 두고 금방 떠날 생각이었다. 렌터카 인수에 약 1시간, 가족들과의 만남에 2시간 이상을 보낸 관계로 다음 목적지인 아미앙까지의 이동시간을 고려하면 일정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마쳤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가벼운 마음으로 핸들을 아미앙 방향으로 향했다. 아미앙에서는 대성당과 우리 가족이 살았던 집을 잠깐 둘러볼 예정이었다.

아미앙에서의 짧은 방문

아미앙에 도착해서 먼저 대성당을 찾았다. 고딕 양식의 웅장한 건물은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내부는 간단히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우리 가족이 살았던 집 앞으로 갔다. 33년 전 살았던 동네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잠깐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고 옛 기억을 되살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가 뛰어놀던 작은 공원도 그대로 있었다.

아미앙에서의 시간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벌써 5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여기서 몽생미셸까지는 365km라는 긴 거리가 남아있었다.

몽생미셸을 향한 긴 여정

몽생미셸까지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네비게이션에 표시되는 도착 예상시간은 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고속도로 운전에는 익숙해졌지만, 하루 종일의 피로가 쌓여 평소처럼 빠른 속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내일 일정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숙소는 몽생미셸 바로 옆이 아니라, 몽생미셸에서 파리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는 곳으로 예약해 놓았다. 몽생미셸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내일 파리로 가는 길에 있는 곳이었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몇 번을 쉬고가는 관계로,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밤 10시가 넘어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짐을 풀어놓으니 몸이 무거웠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일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몽생미셸 야경을 찾아서

피곤했지만 몽생미셸의 야경을 보러 가기로 했다. 몽생미셸 내부는 예전에 두어 번 구경한 적이 있었지만, 밤에 조명을 받은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여행 책자에서 본 야경 사진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호텔에서 잠깐 쉬고 다시 차를 몰고 나섰다. 숙소에서 몽생미셸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밤 운전이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야간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 위치도 낮에 오는 것과는 달랐다.

우리가 네비게이션을 따라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2시가 넘어있었다. 주차장 입구부터 차량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멀리서나마 몽생미셸을 볼 수 있을까 했지만, 안개까지 끼어있어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몇 군데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보려고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시간도 너무 늦었고 내일 일정도 있어서, 결국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 하루는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해서 기적 같은 만남으로 큰 기쁨을 얻었고, 다시 긴 여행으로 피로가 쌓였으며, 마지막에는 아쉬움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날은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였다.


여행자의 단상

은퇴 후의 여행은 젊은 시절의 여행과는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체력의 한계도 있고,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하지만 그 대신 얻는 것들이 있다. 삶의 무게를 알기에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만남들, 그리고 시간의 소중함을 아는 마음이 그것이다.

오늘의 여행에서 가장 값진 것은 관광지를 구경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 인연을 이어가고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이가 들어서 하는 여행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유럽4일차 실수가 만든 특별한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