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6일차 - 몽생미셸에서의 아침과 니스로의 여

by 이 범수

시차 적응, 그리고 깊은 잠의 선물

어제는 얼마나 피곤했던지 몽생미셸 구경을 실패하고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잠에 들어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지금까지 시차 적응이 완전하지 않아 깊은 잠이 들지 못하고 한두 시간마다 깨곤 했는데, 어제의 피곤함 덕분에 깨지 않고 푹 잤다. 덕분에 시차 적응도 완전하게 된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60대를 넘어서면서 밤잠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다. 집에서도 새벽에 한두 번씩은 깨는 것이 일상이 되었는데, 하물며 여행지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어제 하루 종일 365km를 달리며 쌓인 피로가 오히려 약이 되어 깊은 잠을 선사해 주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의 리듬을 받아들이는 것도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안개 속 몽생미셸에서의 특별한 연주

아침 일찍 서둘러 몽생미셸을 다시 찾았다. 늦어도 9시에는 이곳에서 파리로 출발해야 한다. 오늘 니스행 비행기가 오후 4시 55분 출발이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몽생미셸을 관광하기 위하여 365km를 달려와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안개가 어젯밤처럼 심하지 않았다. 약간의 안개는 몽생미셸과 어울려 더욱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안개 낀 몽생미셸 그리고 주변 푸른 초원을 노니는 양 떼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그림 앞에서, 나는 대금을 꺼내 들어 섬집아기를 연주했다. 지나가던 관광객이 서서 사진을 찍고 간다.

퇴직을 앞두고 취미로 익힌 대금이 이렇게 유럽 땅에서 빛을 발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안개 낀 몽생미셸, 푸른 초원의 양 떼들 그리고 청아한 대금 소리. 그들에게 나의 연주가 또 하나의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는 긍정적인 작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연주했다.

섬집아기를 시작으로 인연, 칠갑산, 고향의 봄 등을 연주했다. 약 40분간 나는 연주하고 아내는 사진작가가 되어 열심히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록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진 몇 장을 대학 동창들이 모여 있는 SNS에 올렸다. 많은 친구들이 너무나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었다. 때로는 과하게 칭찬의 문구도 있었다. '대한민국 홍보대사', 'K-Culture 유럽 전도사', '생각하면 실행하는 추진력의 소유자' 등등 조금은 심하게 과장된 응원 문구들이 줄을 이었다.

누구에게나 항상 칭찬과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대학 동창들의 SNS 방이 나는 이래서 좋다. 그래서 나도 항상 긍정적인 내용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려고 노력한다. 힘들었던 어제의 생각이 말끔히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46년을 함께해온 친구들의 진심 어린 격려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새삼 느꼈다.


작은 후회와 깨달음

연주를 마치고 다시 한번 몽생미셸의 웅장함과 고고함에 감탄하고 돌아오면서 보니 몽생미셸이 바로 보이는 곳에 호텔이 있었다. 왜 저 호텔에 투숙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급하게 밀려온다. 물론 그 호텔의 투숙 비용은 내가 묵은 호텔비용보다는 두배 이상의 추가 비용이 필요하다. 물론 비싼 호텔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 전체의 비용으로 보면 지극히 미미한 것이다.

왜 나는 저런 호텔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비용 때문에, 내일을 위하여 파리 샤를드골 공항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을 택했기 때문에. 아니, 저 호텔이 검색은 되었어도 비싼 비용 때문에 나는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호텔은 잠만 자는 곳으로 항상 비싼 비용은 아깝다고 생각했다. 특히 해와 출장시 투숙하는 호텔은 더욱더 그랬다. 이제 호텔을 예약하는 목적에 잠자는 곳 그 외의 것도 고려를 하는 사고의 폭을 넓히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왜 수많은 피서객이 몰리는 7, 8월을 나는 유럽 여행의 일정으로 잡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아직 직장생활 할 때의 생각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가난 때문에 절약이 최고의 미덕처럼 생각하고 성장하고 생활했고, 회사의 휴가가 8월 초이니 당연히 여행은 8월에 가야 한다는 무의식 속에서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젠 생각의 폭을 조금은 넓혀야 할 것 같다. 1년 중 가장 한산한 기간에 여행을 하자. 지난 2월 한 달 제주에서 살면서 비수기 여행이 얼마나 저렴하고 효율적인지 경험했지만, 아직 나의 몸속에 완전히 녹아들어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더 효율적인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한 번의 경험이라고 생각하자"고 아내는 나를 위로한다. 아내는 나보다 융통성이 있고 생각의 폭이 크다. 40년 가까이 함께 살면서도 아내에게서 배울 점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샤를드골 공항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365km를 달려온 소중한 목적을 달성하고 9시가 되기 전에 호텔을 나와 샤를드골 공항으로 향했다. 자동차 페달을 밟는 발이 어제보다 가볍고 자동차도 규정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옆에 앉은 아내는 "당신 컨디션이 어제보다 훨씬 좋은 것 같다. 자동차가 어제보다 경쾌하게 달리는 것 같다"고 했다.

2시 전에 공항에 도착한다는 계획으로 달려왔는데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1시 15분이었다. 한결 마음이 여유로웠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렌터카 반납 장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당연히 공항에 오면 이정표가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고민 없이 2청사까지 달려왔는데 렌터카 반납장소를 알리는 이정표를 찾을 수가 없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었다.

2청사를 몇 번이고 배회했지만 차를 세우고 누구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적당히 차를 세울 장소도 없다. 차를 세울 장소를 찾아서 주차하고 차에서 내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다행히 한 사람이 2청사 E에 렌터카 반납 장소가 있다고 했다. 2청사 E에 가니 이제야 렌터카 반납 장소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두 가지가 아쉬웠다. 공항 초입부터 렌터카 반납 장소의 이정표가 필요하고, 또 하나는 어제 1청사에서 차를 내줄 때 2청사에 반납을 하라는 이야기만 하지 말고 2청사 E에 반납하라고 이야기해야 했였다. 우여곡절 끝에 반납을 하고 나니 벌써 2시가 조금 지났다.


좌석 배정의 황당함과 Sky Priority의 혜택

니스행 국내선 체크인을 하려고 갔는데 오늘 만석이고 내가 사전 좌석 배정을 하지 않아서 좌석이 없으니 기다려달라고 했다. 이게 또 무슨 황당한 이야기인가. 내가 비용을 이미 다 지급하고 예약을 했는데 좌석이 없을 수도 있다니. 이 상황이 이해할 수 없다고 카운터 담당자에게 이야기하니 다행히 내가 Sky Priority 회원이기에 최우선 순위로 배정이 될 것이니 오늘 니스에 가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안심을 시켜주었다.

잠시 후 좌석이 확정되었다고 발권을 해주었다. 젊었을 때부터 쌓아온 항공사 마일리지의 혜택이 이런 곳에서 빛을 발한다. 잠시나마 우리에게는 평화의 시간이 찾아왔다. 간단하게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는 지난 5일간의 일들을 돌이키며 즐겁게 니스행 비행기를 기다렸다.


니스에서의 새로운 시작, Enterprise의 친절함

니스에 도착하여 렌터카를 받으러 갔다. 어제와 다른 회사여서 그런지 너무도 친절하다. 그리고 나는 작은 차를 선호한다고 했더니 작은 차로 바꾸어주는데 비용이 예약했던 비용보다 30%는 저렴했다. 그리고 상세하게 차가 주차된 곳을 지도에 표시하여 알려주었다.

어제는 차를 찾는 것도 몇 번이고 창구에 다시 내려가서 확인하고 찾았는데 오늘은 너무 친절하고 순조롭게 일이 풀렸다. 다음에는 항상 이 회사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렌터카로는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회사이지만 대단히 친절하고 깔끔하게 고객의 입장에서 일을 처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nterprise... 이 이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같은 렌터카 서비스라도 회사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 여행에서는 작은 친절함이 하루 전체의 기분을 좌우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나이가 들수록 서비스의 질이 여행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실감한다.

니스의 밤, 그리고 새로운 여행의 시작

호텔에 짐을 푸니 벌써 밤 9시가 가까워졌다. 그러나 이곳은 아직 대낮같이 밝다. 밤 10시경에 해가 지므로.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려고 니스 중심가로 나갔다. 역시 관광의 도시답게 관광객처럼 보이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활기차다. 물가도 역시 비싸다.

자, 내일부터는 처음 가보는 프랑스 남부를 즐기자.

니스의 거리를 걸으며 지중해의 바람을 맞는다. 파리의 차가운 공기와는 확연히 다른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 어제까지의 우여곡절들이 모두 이 순간을 위한 과정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6일간의 여행을 돌이켜보니 매일이 새로운 도전과 작은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는 일들, 예상치 못한 문제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작은 성취감들. 이 모든 것이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싶다.

젊었을 때의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목표였다면, 이제는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 마주치는 상황들,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몽생미셸에서의 대금 연주가 낯선 이들에게 작은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처럼, 여행은 나누는 것이고 함께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내일부터 시작될 프랑스 남부 여행이 기대된다. 어떤 새로운 경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내와 함께 걸어온 40년의 세월처럼, 앞으로의 여행길도 서로를 의지하며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걸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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