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10일차 - 아비뇽에서 안시로

by 이 범수

교황의 도시로 향하는 길

벌써 열흘째다. 시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빠를 줄이야. 아침 일찍 서둘러 아비뇽으로 향했다.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도 '아비뇽 유수'만큼은 알고 있었다. 14세기, 교황이 로마를 떠나 이곳에 머물렀던 그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다.

가는 길에 눈에 띈 것은 아비뇽의 트램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도시에서 본 트램과는 사뭇 달랐다. 철로 주위에 푸른 잔디가 심어져 있어 마치 트램이 초원을 달리는 듯했다. 은빛 몸체가 초록빛 융단 위를 미끄러져 가는 모습이 꽤나 시적이었다.

문득 내가 살고 있는 동탄이 생각났다. 곧 트램 공사가 시작될 예정인데, 신도시 조성 시부터 계획되어 이미 만들어둔 트램 노선 부지에 지금 푸른 잔디가 심어져 있다. 동탄도 이곳처럼 푸른 잔디 위를 달리는 트램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그때쯤이면 나는 몇 살이 될까. 그 트램을 타고 어디로 가게 될까. 나이 들어가는 것이 두렵지만은 않은 이유가, 아직도 미래에 대한 소소한 기대들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황청, 또 하나의 세상

커다란 성곽처럼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교황청.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 7명의 교황이 거주했던 이곳은 바티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교황궁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조금 놀랐다. 완벽히 자급자족이 가능한 새로운 하나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이 갖춰진 또 다른 소도시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힘든 점이 두 가지 있다면 주차와 화장실 문제다. 화장실은 당연히 돈을 주고 사용해야 하는데 찾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공짜였다.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나 싶어 이곳저곳을 살펴봐도 돈 받는 곳이 없었다.

모든 공공장소에 잘 관리된 공중화장실이 곳곳에 설치된 한국과는 참 다른 풍경이다. 10일 동안 유럽의 리듬에 맞춰 살다 보니, 나도 이곳에 적응이 된 것인지 공짜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기분이었다. 참 인간은 적응을 잘하는 동물이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작은 변화들이 내가 정말 여행 중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일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 다른 세상의 규칙에 몸을 맡기고 있다는 것을.

천천히 걸어가며 구경하고 교황청사, 교황 정원, 그리고 아비뇽 다리 입장권을 구매했다.

번역 앱이 선사한 깊이

교황청사 내부를 구석구석 돌아보며 역사적인 사건의 한순간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을 갖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것이 번역 앱이었다. 아내는 구석구석 번역 앱을 통해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번역된 내용을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과거에는 이런 관광을 할 때 시각적인 것밖에 볼 수 없었다. 특히 프랑스는 다른 나라와 달리 영어 설명서가 거의 없다. 자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나라 답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관광이 중요한 재원 중의 하나이지만 관광객을 위한 배려는 없는 것 같다. 이젠 영어는 단순한 영국 미국의 언어가 아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도 번역 앱 덕분에 작품 하나하나, 사건 하나하나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벽화 하나, 조각상 하나에도 수백 년의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번역 앱이 들려주는 설명을 보고 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한순간에 만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기술의 발달이 우리 같은 노년층에게도 이런 선물을 안겨준다니. 젊었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이번 여행에서 돌아가면 투자 자산분배에서 반도체에 대한 비중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겠다.

교황청사 구경에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이제 배도 고팠다. 점심을 먹고 전자제품 가게에 들러 마우스를 구매했다. 마우스가 고장 나서 지난 며칠간 무척 힘들었다. 터치패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컴퓨터 작업을 하는 데 평소보다 두 배의 시간이 걸렸다. 어제 호텔 근처 대형 슈퍼마켓에서도 마우스를 찾을 수 없었는데, 소도시 아비뇽 교황청에는 없는 게 없는 것 같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

즐거운 마음으로 마우스를 구입하고 교황 정원에 거의 도착했는데, 문득 내 손이 허전했다. 새로 구입한 마우그만 있고 휴대폰이 없었다.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2년 전 이탈리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휴대폰을 잊어버렸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때는 한국에 전화해서 휴대폰을 해지하고 모든 금융계좌를 동결시켰다. 한국에 돌아와 과거 사용하던 휴대폰으로 개통은 했지만, 금융계좌를 정상화하고 다른 것들을 정리하는 데 꼬박 일주일이 소요되었다. 그 일주일은 정말 지옥 같았다.

우리는 FNAC으로 달렸다. 아마 이 순간 내 발걸음은 우사인 볼트도 나를 따라잡지 못할 속도였을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몸소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아내도 덩달아 뛰었다. 우리 부부가 언제 이렇게 함께 뛴 적이 있었나.

다행히 휴대전화는 그곳에 있었다. 계산대 직원이 따뜻한 미소와 함께 전달해 주었다. 그 미소가 천사의 미소처럼 고마웠다. 나는 너무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하며 다시 교황 정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잠깐이지만 세상이 끝날 것 같았던 순간이었다. 만일 휴대전화를 돌려 받지 못했다면 이번 여행을 여기서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든 예약, 일정, 여행 계획서가 이 작은 기계 안에 들어있고, 각종 결제 때문에 계좌 동결도 쉽지 않은 시점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나의 모든 것이 휴대전화라는 작은 기계에 매달려 있는 느낌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렇게 되었을까. 기술의 발달이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도 안겨주었다.

이탈리아에서 잃어버렸던 그 휴대전화는 2주 후 아이스크림 가게 직원으로부터 메일이 왔었다. 내가 잃어버린 휴대전화를 보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전화 금융사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니 사실이었다. 세상에는 아직도 착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 휴대전화가 오늘 또 잠시 나의 곁을 떠나 다시 놀라게 했다.

이 기계와 나와의 인연은 정말 질기다. 이제는 정말로 목에 걸고 다녀야겠다. 나이 들어서는 건망증도 심해지는데 말이다.

소박한 교황 정원과 전설의 다리

여러 생각에 잠겨 도착한 교황 정원은 의외로 소박했다. 웅장한 교황청에 비해 정원은 너무나도 자그마했다. 하지만 그 소박함이 오히려 인간적이었다.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교황들도 결국은 이런 소소한 아름다움을 즐겼을 것이다. 정원 한편에 핀 꽃들이 7백 년 전 그들이 보았던 꽃들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아비뇽 다리로 갔다. 정식 이름은 생베네제 다리. 12세기에 건설되어 한때는 론 강을 가로질러 900미터에 달했던 이 다리는 지금은 절반도 남지 않았다. 강 중간에서 뚝 끊어져 있는 모습이 마치 미완의 꿈처럼 보였다.

홍수와 전쟁으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고, 수리 비용이 너무 커서 결국 포기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동요 '아비뇽 다리에서'의 그 다리가 바로 이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온 일행이 사진을 찍고 있으서 내가 찍어주겠다고 함께 서라고 했더니 감사하다면서 휴대폰을 나에게 건내는데 사진이 아니고 동영상 준비였다, 그들은 아비뇽 다리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었다. 나는 일심히 촬영을 해 주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교황청의 모습은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론 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그 너머로 교황청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세월은 흘러도 강은 여전히 흐르고, 역사는 그렇게 층층이 쌓여간다.

33년 전 그 도시를 다시

이제 안시로 향할 시간이다. 1992년 여름 두 달간 릴(Lille)에 출장 와 있을 때 주말을 이용해 안시를 다녀간 적이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도시였다. 지금까지도 안시는 내가 가본 도시 중 가장 아름다운 도시이다. 33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 안시는 여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멀리 눈 덮인 알프스 산맥, 푸른 언덕 위의 예쁜 집들, 맑고 푸른 안시 호수, 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구시가지, 그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줄기.

그때의 감동을 아내에게 몇 번 이야기했더니, 아내는 이번 여행 코스에 반드시 안시를 포함하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시로 간다.

나는 이번 여행에 두 가지 바람이 있다. 첫째는 33년 전에 느꼈던 안시의 그 아름다운 환상이 깨어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기를. 둘째는 이번 여행에서 안시보다 더 아름다운 도시를 발견해서 내 마음속 순위가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이 두 바람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름다운 기억이 그대로 보존되는 것도 소중하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도 모두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차창 밖으로 프랑스의 시골 풍경이 흘러간다. 33년 전 그 젊은 출장자는 혼자였지만, 지금의 나는 평생의 동반자와 함께다. 그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33년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여행자의 마음

10일간의 여행이 나에게 준 것들을 생각해 본다. 새로운 풍경, 새로운 사람들, 작은 해프닝들, 그리고 과거의 기억들과 현재가 만나는 순간들.

나이가 들어서 하는 여행은 젊었을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체력은 부족하지만 마음의 여유는 더 크다. 모든 것을 다 보고 경험해야 한다는 조급함 대신 하나하나를 더 깊이 음미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이 모든 경험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혼자였다면 휴대폰을 잃어버렸을 때 그렇게 빨리 찾을 수 있었을까. 아내가 번역 앱으로 설명을 찾아 들려주지 않았다면 교황청의 역사를 그렇게 깊이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여행은 계속된다. 안시에서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오늘도 여행은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선물들을 안겨준다. 작은 두려움과 큰 기쁨, 소중한 기억들과 새로운 꿈들을 품고 우리는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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