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만의 재회
안시에 도착하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대금을 들고 호수로 향했다. 33년 전 기억 속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다시 만난다는 기대감과 함께, 그 환상이 깨지지 않았으면 하는 약간의 긴장감이 교차했다. 그런데 산 위에는 눈이 없었다. 바위만 보였다. 나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호수가에 앉아서 대금을 연주했다. 한 사람이 사진을 열심히 찍더니 연주가 끝나자 내게로 다가왔다. 본인은 이탈리아에서 온 거리 사진작가로 거리의 다양한 활동을 촬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소개하며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왔다고 소개하니 일본인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나는 한국의 대금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했다. 그리고 두어 곡을 더 연주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카운터 직원에게 옛날 내가 방문했을 때는 산 위에 눈이 있었는데 내가 잘못 보았는지 물어보니 언제 방문했냐고 했다. 1992년 8월이라고 이야기하자 그때는 있을 수도 있었다고 했다. 요즘 이상기후로 여름에는 눈을 보는 경우가 드물다고 했다. 기후 위기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 영향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느낄 줄은 몰랐다.
동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아침을 먹고 우리는 다시 시내로 나갔다. 구글 지도에 가야 할 곳을 여러 곳 표시했지만 오늘은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 도시도 자그마하고 가는 곳이 다 감탄을 자아내는 곳이었다. 어디에서든 클릭만 하면 화보 같은 사진이 나온다고 아내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리는 정신없이 물을 따라 도시 구석구석을 누볐다. 그러다 보니 안시의 명소라는 곳은 모두 구경한 것 같았다.
정신없이 동화 속 이야기에서 나올 듯 한 아름다운 도시를 누비고 우리는 호수가 벤치에 앉아서 호수와 산만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명상이고 나의 머릿속에 있는 온갖 잡생각이 지워지는 것 같았다.
유람선이 호수에서 운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유람선을 타고 호수 저 멀리까지 구경하기로 했다. 유람선은 빠르게 30분을 달렸는데 호수 끝까지는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길이가 45km라고 선장이 안내했다. 안시 호수는 기원전 1,800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라고 한다. 면적은 27.59km²로 여의도 면적의 9.5배에 달하는 크기로 물이 가장 깨끗한 호수라고 한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물에 사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호수가 흘러내려 강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도심에서도 물고기는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해버린 것
33년 전 안시에 올 때 가지고 있던 설렘과 약간의 긴장감. 시냇물이 흐르는 동화 속 이야기 같은 마을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꽃들로 치장된 집들과 거리는 한층 더 예쁨을 더해주었다. 알프스 언덕 위 주황색 지붕의 예쁜 집들은 오늘도 누군가에게 마음의 풍요로움을 주고, 맑은 알프스의 물은 안시 호수를 지나 마을을 흐르며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단지 산꼭대기의 흰 눈은 지구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시간이 주는 선물
은퇴 후 이런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젊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33년 전에는 그저 아름답다고만 느꼈던 안시가 이제는 다르게 다가온다.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 속에서 변해버린 것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속에서 시간의 흐름과 지구의 변화를 읽게 된다.
호수가 벤치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 시간들이 가장 소중했다. 바쁘게 살아온 지난날들을 뒤로하고, 이제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함을 느낀다. 명소를 찾아다니고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한 곳에 앉아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의 의미가 아닐까.
대금 소리가 호수 위로 퍼져나갈 때, 이탈리아 사진작가와 나눈 짧은 대화에서도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을 발견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예술과 아름다움이라는 공통분모로 만나는 순간. 이런 만남들이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겸손한 마음으로
33년 만에 다시 찾은 안시는 나에게 겸손함을 가르쳐주었다. 기억 속 완벽했던 풍경이 조금 달라져 있을 때 느꼈던 실망감. 하지만 그 실망감은 곧 더 깊은 이해로 바뀌었다. 산 위의 눈이 사라진 것은 자연의 변화이고, 그 변화 속에서도 안시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호텔 직원이 들려준 기후변화 이야기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 동안 지구도 함께 변해왔고, 그 변화의 증인이 되어 이곳에 다시 서 있는 것이다. 슬프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한 이 경험이 우리 세대가 가져야 할 책임감을 일깨워준다.
안시의 맑은 물과 예쁜 집들, 꽃으로 장식된 거리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내는 이 도시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갖게 된 것, 그것이 바로 은퇴 후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오늘 하루는 조용히 자연을 즐기자고 마음먹었던 대로, 우리는 계획에 얽매이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그 자유로움 속에서 찾은 진짜 안시의 모습이 33년 전 기억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