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전 기억 속 안시의 변화
33년 전 품었던 안시에 대한 환상이 살짝 흔들렸다. 알프스의 웅장한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기억 속 저 멀리 하얗게 빛나던 만년설이 사라져 있었다. 기후변화라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아쉬움을 호텔 직원에게 털어놓자, 그는 주저 없이 샤모니 몽블랑을 추천했다.
"몽블랑은 꼭 가보셔야 해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몽블랑은 이번 여행 계획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곳이었다.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제외시킨 것이었는데, 아내도 몽블랑이 빠진 것을 아쉬워하던 차였다. 호텔 직원의 적극적인 권유에 우리는 마음을 바꿨다.
"그래, 어차피 우리 여행은 발걸음 닿는 대로 가는 거 아니었나."
계획된 스위스 체르마트 일정을 과감히 취소하고 샤모니로 향했다. 은퇴 후의 여행이기에 가능한 융통성이었다. 젊은 시절이라면 치밀하게 짠 일정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이제는 그런 부담에서 자유로워진 것이 참 좋았다.
예상치 못한 작은 모험들
안시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샤모니로 출발했다. 거리가 멀지 않아 일찍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어느 이름 모를 알프스의 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테라스가 딸린 방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다. 여행의 운이 따르는 순간이었다.
몽블랑 케이블카 티켓을 온라인으로 예약하려 했지만 결제가 계속 실패했다. 내 노트북 문제인가 싶어 호텔 데스크톱으로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사이트에서 한국 카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시도를 해봐도 소용없었고, 보안 문제로 관련 매니저에게 연락하라는 메시지만 뜰 뿐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현장에 가서 표를 사세요. 분명 가능할 거예요."
호텔 직원의 조언에 따라 현장 발권으로 계획을 바꿨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이런 것도 여행의 재미가 아닐까 생각했다.
일찍 저녁을 먹고 나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호텔 테라스에서 대금을 꺼내 연주를 시작했다. 마침 길 건너편 클럽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영업하고 있어서, 나도 눈치 보지 않고 소리를 낼 수 있었다. 내 대금 소리가 클럽의 음악 소리보다는 훨씬 작았으니까.
눈 덮인 샤모니 산을 배경으로 '칠갑산'을 연주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고향의 정서가 담긴 곡이 알프스의 설경과 어우러지니 묘한 감동이 일었다.
3,842미터에서 마주한 시간의 무게
다음 날 아침 일찍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이른 시간이여서인지 주차 그리고 현장에서 표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온라인 결제로 고생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간단했다.
케이블카를 두 번, 엘리베이터를 한 번 타고 3,842미터 고지에 도달했다. 비행기 안에서를 제외하고는 평생 처음 밟아보는 높은 곳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오길 정말 잘했어!"
아내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내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숨이 가빠오고, 피곤함이 몰려왔으며, 잠이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닥이 평평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2011년 8월, 3,770미터 후지산 정상을 14시간에 걸쳐 올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약 100미터 낮은 곳이었는데도 그때는 이런 고산증세가 없었다. 매일 아침 수영하고, 일주일에 두세 번 헬스클럽에서 PT를 받으며 건강 관리에 힘쓰고 있지만, 14년이라는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힘들었지만 쉬어가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오랜 시간 그곳에 머물며 몽블랑의 웅장함을 마음 속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설탕을 진하게 넣어 마시고 하산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향했다.
작은 해프닝과 웃음
케이블카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는데 내 차례가 다가오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이 줄이 샤모니로 가는 줄이 맞나요?"
"아니요, 이 줄은 이탈리아로 가는 거예요."
깜짝 놀라 밖으로 나왔다. 물론 탑승 전 승차권을 확인하기 때문에 실제로 이탈리아로 갈 가능성은 없었지만, 큰일 날 뻔했다며 아내와 한바탕 웃었다.
샤모니 쪽 줄을 찾아 개찰구에 들어서니 직원이 물었다.
"그린카드 있으세요?"
내 티켓은 하얀색이었다.
"그린카드가 뭐죠?"
"하얀색 카드는 12시 이전에 하산해야 하는 표예요."
시계를 보니 12시 30분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이런 사항을 알려주지 않았고, 티켓에도 그런 내용이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페널티를 물어야 하나요, 아니면 여기 내려가지 못하고 있어야 하나요?"
웃으며 물어보니 직원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내려가세요."
결국 약속된 시간을 30분 초과해서 몽블랑을 즐기고 내려온 셈이었다.
나이를 인정하는 순간
갑작스러운 기온과 기압의 변화로 아내와 내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아내는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며 호텔로 돌아가자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호텔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잠깐 잠을 자니 컨디션은 회복된 것 같았는데, 알레르기가 시작됐다. 한국에서는 식단 조절과 컨디션 관리로 알레르기 약을 먹지 않고 지낸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면역력이 약해진 것 같았다.
이제는 슬프지만 나이가 든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고려해 환경의 변화에 순응하며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끼는 순간이었다. 젊은 시절처럼 무리하며 여행할 수는 없지만, 그 대신 여유롭게 하루하루를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이 은퇴 후 여행의 장점이 아닐까.
새로운 기대와 현실적인 준비
급조된 일정이었지만 아주 인상적인 하루였다.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밤이 이렇게 저물어갔다. 내일은 주변의 아기자기한 곳들을 둘러보고 스위스 인터라켄으로 향할 예정이다.
스위스는 처음 가는 곳이다. 1992년 안시에 왔다가 제네바에 가려고 했는데, 일행 중 한 사람이 여권을 소지하지 않아서 가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아쉬워했는데, 33년이 지나서야 스위스 땅을 밟게 되는 것이다.
처음 가는 스위스에 대한 걱정도 있지만, 다행히 인터라켓을 안내하는 현지 가이드를 예약해뒀다. 융프라우도 마찬가지로 가이드와 함께 여행할 계획이다. 나이가 들수록 편안한 여행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조금은 스트레스도 덜고, 가이드가 안내해 주는 대로만 따라다니면 될 것이다.
은퇴 후의 삶은 이렇게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새로운 경험에 대한 설렘을 잃지 않는 것이 아닐까.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젊은 시절처럼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앞선다. 내일은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
새로운 목적지에 대한 기대를 안고 샤모니 프랑스의 마지막 밤을 왕의 남자 OST 인연의 연주와 함께 마무리 지었다. 아내는 열심히 나의 연주와 샤모니의 아름다운 경관을 동영상에 담았다. 연주하고 동영상을 보니 나의 연주가 아름다운 경관을 따라가지 못한다. 좀 더 열심히 연습하여 완전한 나의 연주곡으로 만들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