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아침과 새로운 시작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가뿐하고 상쾌했다. 어제 무리하지 않고 일찍 휴식을 취한 탓이었다. 여행 중반에 접어들면서 몸의 리듬을 조절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젊은 시절이었다면 피로도 모르고 밤 늦게까지 돌아다녔겠지만, 이제는 적당한 휴식이야말로 더 깊이 있는 여행을 위한 필수 요소라는 것을 안다.
오늘은 드디어 스위스 인터라켄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난생 처음 스위스 땅을 밟아본다는 설렘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동안 책과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알프스의 나라, 정확한 시계와 맛있는 치즈로 유명한 그 나라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몽땅베르 빙하 동굴로의 여정
스위스로 넘어가기 전에 샤모니에서 놓칠 수 없는 곳이 하나 있었다. 바로 몽땅베르 빙하 동굴이었다.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역에서 산악 기차가 출발하여 해발 1,913m에 있는 몽땅베르 역(Gare Du Montenveres)까지 운행한다고 했다.
역에 도착하자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일부는 전문 등산가 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각국에서 온 듯한 다양한 언어들이 들려왔고, 모두들 기대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니 우리만 설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가 타게 된 기차는 말로만 듣던 산악 열차였다. 일반 열차처럼 바퀴가 구르는 두 개의 레일이 있고, 가운데에는 커다란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레일이 하나 더 있었다. 이른바 '랙 레일웨이(Rack Railway)' 시스템이다. 급경사를 오르내릴 때 톱니바퀴가 중앙 레일의 톱니와 맞물려 미끄러지지 않고 안전하게 운행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라고 한다. 19세기부터 사용되어온 이 기술을 직접 체험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 교육이었다.
기차는 힘차게 달려서 약 20분 후에 해발 1,913m에 있는 몽땅베르 역에 도착하였다. 해발 고도가 높아지자 아래와 달리 기온이 확연히 내려갔다. 우리는 서둘러 준비해 온 따뜻한 옷을 다시 껴입었다. 이런 기온 변화야말로 산악 지대 여행의 묘미 중 하나일 것이다.
빙하 동굴에서 만난 자연의 경이로움
몽땅베르 역에서 다시 곤돌라를 타고 빙하 동굴 입구까지 이동하였다. 곤돌라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과 그 사이로 흐르는 빙하의 모습이 자연의 웅장함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입구에 도착하자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상당한 길이의 동굴인데, 이 동굴은 빙하 계곡 내부에 사람이 만든 것이었다. 자연이 수억 년에 걸쳐 만들어낸 빙하 속에 인간의 손으로 길을 낸 것이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푸른빛을 띤 얼음 벽들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형광등 불빛이 얼음에 반사되어 마치 다른 세계에 온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는 얼음 동굴 속의 모습을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하지만 사진으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그 차가운 공기와 신비로운 분위기, 그리고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은 오직 그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얼음은 수천, 수만 년에 걸쳐 쌓이고 압축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지구의 역사였다.
동굴 안에서는 다양한 얼음 조각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매년 새롭게 제작된다는 이 조각품들은 얼음이라는 재료의 특성을 살려 투명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특히 알프스의 야생동물들을 형상화한 조각품들은 이 지역의 자연생태계에 대한 이해를 더해주었다.
지구 온난화의 현실을 마주하다
동굴 구경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오니 빙하 동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전시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빙하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1년에 6~7m씩 줄어든다고 한다. 1825년도 사진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한 자료를 보니 그 변화가 충격적이었다. 당시에는 계곡 전체가 빙하로 형성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상당 부분이 빙하가 녹고 검은 흙과 바위가 드러나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현재의 후퇴 속도로 계산할 때 2070년경에는 이 빙하가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지구 온난화와 이상기후는 여름에 폭우가 오거나 겨울이 따뜻해지는 것 정도로만 몸소 느낄 수 있었는데, 이곳에 와서 훨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변화를 목격할 수 있었다. 수치와 그래프로만 접했던 기후변화가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생한 현실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한 프랑스인 가이드는 자신이 어린 시절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와 지금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고 말했다. "제가 20년 전에 처음 이곳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빙하가 지금보다 훨씬 아래쪽까지 내려와 있었어요. 매년 오는 관광객들도 그 변화를 느낀다고 말씀하시죠." 그의 말에서 안타까움과 걱정이 묻어나왔다.
이런 현실을 목격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줄 지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편리함을 추구하며 살아온 우리 세대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이런 소중한 자연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들이 더욱 절실함을 깨달았다.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빙하 동굴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스위스 인터라켄을 향해 출발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가는 것 같았다. 마치 옛날 우리나라의 문경새재나 육십령 고개를 넘어가듯이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운전해야 했다. 직접 핸들을 잡고 운전하면서 느끼는 알프스의 험준함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승용차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계속해서 변해갔다. 프랑스의 샤모니 일대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산악 풍경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졌다. 깎아지른 듯 한 절벽과 구름에 가려진 봉우리들, 그리고 그 사이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까지. 자연이 만들어낸 이 거대한 조각품 앞에서는 절로 겸손해질 수 밖에 없었다. 중간중간 안전한 곳에서 차를 세우고 사진도 찍고 잠시 쉬어가며 여유롭게 드라이브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