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욕조의 여유
어제 밤 어쩔수 없이 무리해서 비싸게 잡은 호텔에서 묶었다. 비싼 만큼 시설은 지금까지 중 최고였다. 무엇보다 욕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묵었던 호텔들은 모두 샤워 시설만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잡은 호텔이지만 비싼 만큼 제값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나는 드렁가자 말자 반신욕부터 했다. 97년쯤 삼성코닝에 계셨던 사장님이 개인 홈페이지에서 금연 운동과 함께 반신욕을 소개하신 게 생각났다. 그때 홈페이지에 가입하면 반신욕에 대한 소책자를 보내주셨는데, 그 책을 읽고 시작한 반신욕이 벌써 27년째다. 이제는 주 3-4회 하는 게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었다.
아내도 내가 하는 모습을 보고 오래전부터 따라 하기 시작했는데, 여행 중엔 할 수 없어서 늘 아쉬워했다. 오늘은 저녁과 아침 두 번이나 할 수 있어서 아내가 무척 기뻐했다. 반신욕을 한 덕분인지 몸이 확실히 가벼워지는 것 같다.
하더 쿨름에서 본 인터라켄의 절경
오늘 첫 행선지는 하더 쿨름(Harder Kulm) 전망대였다. 인터라켄에서 가장 유명한 전망대 중 하나로, 해발 1,323m에 위치해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약 10분 정도 올라가니 인터라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툰 호수(Thunersee)와 브리엔츠 호수(Brienzersee) 사이에 자리 잡은 인터라켄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두 호수가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고, 그 사이에 펼쳐진 도시의 모습이 마치 그림 같았다. 멀리 알프스 산봉우리들에는 만년설이 하얗게 쌓여 있어 병풍처럼 둘러싼 모습이 장관이었다.
전망대에는 '하더 쿨름'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대형 글자가 있어서 기념사진을 찍기 좋았다. 공기가 맑아서 사진이 선명하게 나왔고, 어디를 찍어도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하늘에는 페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어디서 날아온 건지 유튜브에서만 보던 페러글라이딩 장면을 실제로 보니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모습이 신기했다.
오래된 아픈 기억
페러글라이딩을 보자 아내가 "우리는 저런 건 하지 말자"고 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90년대 말 대구의 프랑스 합작회사에서 근무할 때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프랑스에는 일정한 연령이 되는 남성들에게 의무적으로 군대를 가든지 기업체에 인턴으로 일정 기간 일을 하든지 선택하는 제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인턴으로 한국에 와서 근무하는 젊은 친구가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대구 근교에서 주말이면 페러글라이딩을 즐겼다.
그런데 어느 날 뭔가 잘못되어 낙하산이 펴지지 않고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친구가 재무 쪽에 파견된 관계로 이 친구가 우리 회사에서 일했다는 것은 사고가 난 후에 알았지만, 안타까운 마음에서 마지막 가는 길에 명복이라도 빌어주고자 영결미사에 참석했다.
프랑스에서 급히 날아와서 아들의 영결미사에 참석하신 나이 많은 부모님을 보니 나도 눈물이 났다. 이국땅에서 아들을 잃고 한줌의 재만 안고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 싶어서였다. 그 일 이후로는 조금이라도 위험이 있는 일은 하지 말자는 게 내 생각이 되었다.
오늘도 페러글라이딩을 보니 그날의 마음 아팠던 기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기차역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의 신기함
전망대 관광을 마치고 베른으로 가는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카페에서 본 자료에는 인터라켄 동에서 출발한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인터라켄 동은 기차역으로 알고 있기에, 유람선이 기차역에서 출발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어제 밤 묵은 호텔 프런트에 문의했다.
"유람선을 타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으니 역시 인터라켄 동으로 가라고 했다. "유람선을 역에서 타냐"고 재차 확인하니 그렇다고 했다. 가서 보니 정말 인터라켄 동역은 기차와 유람선을 모두 탈 수 있는 장소였다.
역사 건물 한쪽에는 기차 승강장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선착장이 연결되어 있었다. 역은 기차만, 유람선은 항구에서만 탄다는 내 고정관념으로는 설명 없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운영하는 것도 나름 효율적이고 편리한 방법인 것 같다. 기차가 출발하는 곳은 당영히 역으로 생각하고 인터라켄 동을 인터라켄 동역으로 나 혼자 단정해 버린 것이다.
고정관념을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조화의 풍경 속으로
지금까지 내 마음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는 안시였는데, 이번 여행에서 눈이 없어져서 조금은 실망했었다. 하지만 이곳 인터라켄은 정말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것 같다.
넓은 호수와 언덕 위의 주황색 지붕들, 넓은 초원과 눈 덮인 높은 산들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있다. 곳곳에서 커다란 물줄기가 폭포가 되어 호수 위로 떨어지는 모습도 장관이다. 자연과 인공 구조물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유람선은 인터라켄 동을 출발하여 베른에 가는데 몇 군데 들렀다 간다. 중간중간 작은 마을들의 선착장에 정박하는데, 각각의 마을마다 나름의 특색이 있어 보기 좋았다. 배에서 바라보는 알프스의 풍경은 육지에서 보는 것과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 이런 풍경을 보니 스위스에 온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들이 스위스를 동화 같은 나라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공학도의 변하지 않는 호기심
유람선이 중간 기착지에 정박하는데, 흔들리는 배의 충격을 받아주는 장치가 몇 군데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충격을 흡수하는 기구가 외경 약 50cm, 두께 15cm, 높이 20cm 정도의 고무 재질로 보이는 링 몇 개였다. 그 큰 배의 충격을 모두 흡수하는 완충 장치 역할을 완벽하게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 작은 장치들이 이렇게 효과적으로 충격을 흡수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 한참 들여다봤다. 고무의 탄성과 링 형태의 구조가 잘 계산되어서 큰 힘을 분산시키는 원리인 것 같았다. "저게 어떻게 이 큰 배의 충격을 저렇게 흡수하냐"고 놀라워하니까 아내는 "퇴직을 해도 공대 출신은 할 수가 없다"고 웃었다.
맞는 말이다. 이런 것들이 여전히 신기하고 궁금하다. 아마 나이가 더 들어도 이런 호기심은 못 고칠 것 같다.
예상과 완전히 다른 숙소
오늘부터 3일간 머물 호텔을 찾아가는 일이 이번 여행 최대의 참사가 될 뻔했다. 프랑스에서 주차에 애로사항을 많이 겪은 나로서는 지정 주차장이라는 문구가 있고 가격도 저렴하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예약했다.
그런데 호텔 주소를 구글 지도에 입력하면서 자세히 보니 체크인 방법을 나에게 메일로 보냈다고 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어렵게 찾아갔는데 주차장이 없고 현관 입구에 자동차 한 대쯤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공터가 있는데 그곳에 주차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하루에 15스위스프랑을 달란다.
알고 보니 이곳에 투숙하는 사람들 중에 차를 가지고 온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는 것 같았다. 우리 방은 3층인데 엘리베이터도 없다고 했다. 아침 식사도 제공하지 않는단다. 맙소사 이었다. 평소 꼼꼼하지 않고 서두르는 나의 성격이 빚은 참사이다.
이제는 이런 것도 경험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루가 아니고 3일이라는 것이 가장 고민스럽다.
아내의 긍정적인 마음에 감사
이런 상황에서 다행히 아내는 "어차피 여행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의 이야기거리 추가하고 저렴해서 좋다"고 했다. 불편한 것은 묻어두고 긍정적인 면으로만 보고 해석해 주니 아내가 고마웠다.
사실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는데, 아내가 이렇게 말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오랫동안 살아보니 이런 아내의 긍정적인 생각이 우리 부부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안다. 이래서 여행은 서로를 더욱 아끼고 이해하는 기회도 되는 것 같다.
내일은 융프라우 관광인데 처음인 나로서는 애로사항이 있을 것 같아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기로 했다. 현지 가이드와 만나는 시간이 8시 30분 인터라켄 동에서인데, 그 시간에 문 연 식당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 아침 준비를 위해서 편의점에 가기로 했다.
반가운 고향의 맛과 소박한 저녁
편의점 COOP에 갔는데 제일 먼저 신라면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곳에서 신라면을 보니 정말 반가웠다. 신라면과 빵으로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까지 먹을 것을 준비해왔다.
근 14일이나 프랑스, 스위스 음식만 먹었는데 모처럼 고향의 맛으로 저녁 만찬을 즐기는 밤이다. 호텔 방에서 컵라면을 먹는 것도 나름 정겨웠다. 뜨거운 라면 한 그릇이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
아내는 "어차피 여행은 고생하고 이야깃거리 만드는 것인데 돈도 아끼고 고향 맛도 즐기고 일석이조"라고 좋아했다. 가끔은 화려한 레스토랑의 정찬보다 이런 소박한 한 끼가 더 만족스럽고 마음이 편하다.
여행을 하다 보니 예상과 다른 일들이 많이 생기지만, 그런 것들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는 걸 느낀다. 아내와 함께라서 더 즐겁게 넘길 수 있는 것 같다. 작은 불편함도, 예상치 못한 상황도 모두 우리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되고 있다. 내일은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