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서의 작은 깨달음
어제 밤 호텔 때문에 잠시 당황했던 마음이 이제는 조금 누그러졌다. 하룻밤을 지나고 보니, 이 호텔도 모든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인터넷 속도는 지금까지 다녀본 호텔 중 최고 수준이다.
로비를 둘러보니 투숙객들 대부분이 젊은 배낭여행족들이었다. 아마도 이들이 경제적 비용을 중시하며 찾아오는 호텔인 듯하다. 그러다 보니 젊은 세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특히 빠른 인터넷—은 정말 훌륭하게 갖춰져 있다. 덕분에 인터넷 속도 때문에 미뤄둔 일들을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세상은 참 공평한 것 같다. 무엇 하나 완벽한 건 없지만, 어딘가엔 장점도 숨어 있다.
융프라우로의 여정
인터라켄 오스트역에서 한국인 가이드를 만났다. 그의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 덕분에 융프라우 여행에 대해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2일용 패스를 구매하고, 기차를 두 번 갈아타며 융프라우요흐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가이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순한 관광 정보를 넘어서는 깊이가 있었다.
특히 스위스의 낙농업에 대한 설명이 인상 깊었다. AOP(Appellation d'Origine Protégée, 원산지 보호 표시) 제도에 대해 들으면서, 한국의 한우와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에 놀랐다. AOP는 와인의 원산지 통제 명칭 제도와 같은 개념으로, 특정 지역에서 전통 방식으로 생산된 치즈만이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엄격한 품질 관리 시스템이라고 한다.
스위스의 소들은 여름철 알프스 고원에서 수백 종류의 풀과 허브를 자유롭게 뜯으며 살아간다. 계곡 지역에 있을 때는 열 가지 남짓한 풀만 먹지만, 알프스에 오르면 훨씬 다양하고 영양가 높은 먹이를 섭취하게 된다. 이렇게 키운 소에서 나온 우유로 만든 치즈가 바로 에멘탈, 그뤼에르 같은 세계적인 스위스 치즈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한우는 입양되면 죽을 때까지 좁은 우리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이곳의 소들은 광활한 자연에서 자유롭게 살아간다. 같은 소이지만 이렇게 다른 삶을 산다니, 문득 우리의 축산업 현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융프라우요흐에서의 경험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했을 때, 짙은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이곳의 절경을 기대했건만, 자연은 우리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우리는 빙하 동굴 등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고, 안개가 걷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융프라우요흐는 해발 3,454미터에 위치한 유럽에서 가장 높은 기차역이다. 융프라우(4,158m)와 묀히(4,107m) 봉우리 사이의 고개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유럽의 정상(Top of Europe)'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한다.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스위스 알프스 융프라우-알레취' 지역의 심장부이기도 하다.
역과 부대시설 자체가 암반 속에 만들어진 인공의 걸작이었다. 1896년부터 1912년까지 무려 16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완성된 이 역까지 가는 7km의 터널은 인간의 의지와 기술력이 이룬 놀라운 성과다. 하지만 이 웅장한 건축물 뒤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숨어 있었다.
역 벽면 한쪽에는 이 공사를 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명패가 걸려 있었다. 어떤 이는 2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공사 중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그 앞에 서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이런 관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관광지의 화려함 뒤에는 항상 누군가의 땀과 눈물, 때로는 생명까지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정상에서의 소박한 간식
식당에서는 컵라면을 제공한다. 융프라우 패스 비용에 포함되어 있어 무료로 제공된다. 처음에는 '이런 곳에서 라면이라니' 싶었지만, 곧 이해가 되었다. 한국 사람만 컵라면을 먹는 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모두 후루룩거리며 라면을 먹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K-푸드의 힘이 아닐까. 잠시 나에겐 지난 2월 한라산 등반중 대피소에서 라면 먹던 기분과도 같았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서 제공하기에 가장 적합한 음식이다. 조리도 간단하고, 차가운 몸을 녹일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다. 스시나 피자, 햄버거, 치즈나 빵으로는 절대 이런 효과를 낼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하다. 정말 가성비 좋은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발 3,400미터에서 먹는 라면 한 그릇이 이렇게 맛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아이거 북벽의 전설
내려오는 길에 아이거 북벽을 지나면서 가이드는 이곳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아이거(3,970m)는 융프라우, 묀히와 함께 베르너 오버란트의 3대 봉우리를 이루는 산이다. 그 중에서도 아이거 북벽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아이거 북벽은 마터호른 북벽, 그랑드조라스 북벽과 함께 '알프스 3대 북벽'으로 불린다고 한다. 계곡 밑에서 정상까지 수직으로 솟은 높이가 1,8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석회암 벽이다. 북벽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면이 거의 하루 종일 햇빛을 받지 못해 눈과 얼음이 가장 먼저 생기고 가장 나중에 녹는, 등반하기에 가장 어려운 사면이기 때문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지금까지 이 북벽 등반을 시도하다가 사망한 사람이 60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클라이머의 공동묘지'라는 무서운 별명도 있단다. 1938년 독일의 안데를 헤크마이어 팀이 최초로 등정에 성공했지만, 그 이전까지 수많은 등반가들이 도전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특히 1936년 독일의 토니 쿠르츠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고 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등반하다가 사고를 당했고, 구조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허공에 매달린 채 죽음을 맞았단다.
창밖으로 보이는 그 거대한 암벽을 바라보며 놀라운 용기와 도전 정신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저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은퇴 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세대에게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극한을 추구하고 불가능에 도전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 또한 인간다운 모습이 아닐까.
툰 호수에서의 여유
융프라우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툰 호수로 향하는 유람선에 몸을 맡겼다. 어제 보았던 베른 호수보다는 아기자기한 맛은 덜했지만, 그 웅장한 규모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툰 호수는 스위스 베른주에 있는 호수로, 표면적이 48.3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베른주 최대의 호수다. 길이 17.5킬로미터, 최대 폭 3.5킬로미터, 최대 깊이 217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 호수는 마지막 빙하기 이후 빙하가 녹아 형성된 것으로, 툰과 인터라켄 사이 알프스 북쪽 주변부에 자리하고 있다. 호수 뒤로는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 등 웅장한 산악 경관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그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유람선 갑판에 서서 호수를 바라보니, 이런 거대한 호수를 만들어낸 자연의 위대함에 경외감이 들었다. 빙하가 깎고 다듬어 만든 이 호수는 수천 년, 수만 년의 시간이 만든 작품이다. 인간의 16년 공사도 대단하지만, 자연의 수만 년 작업은 정말 경이로울 따름이다.
배에서 내려다본 호수는 거울처럼 맑아서 하늘과 구름, 주변 산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오후, 물결 하나 없는 호수 위로 우리 배만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유람선은 슈피츠, 오버호펜, 군텐 같은 작은 마을들을 지나며 운행되는데, 각 마을마다 중세의 성과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호숫가에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순간에는 말이 필요 없다. 그저 바라보고, 느끼고, 마음 깊이 담아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 할머니로부터 들은 스위스의 놀라움
15일째 여행이 이렇게 지나간다. 매일이 새로운 발견과 감동의 연속이다. 젊었을 때는 여행을 하면서도 늘 바쁘게 움직였던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보고, 다 경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하나를 보더라도 천천히,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언어 능력의 놀라움
오늘 툰 호수 유람선에서 만난 할머니를 통해 스위스 사람들의 놀라운 언어 능력을 실감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퇴직하신 그분이 무려 6개 언어를 구사한다니!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는 물론이고 영어, 헝가리어, 네덜란드어까지. 헝가리와 네덜란드에 관광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익혔다고 하시는데, 정말 스위스 사람들은 언어의 천재들만 모여 사는 것 같다.
스위스인들의 살아가는 모습
호숫가의 크고 멋진 집들을 보며 궁금했던 것도 할머니가 속 시원히 답해 주셨다. 저런 큰 집을 한 가족이 다 사용하는 게 아니라 보통 2~3가구가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한두 가구는 렌트를 해서 살아가는 것이란다.
오늘 하루도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호텔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해서, 융프라우의 웅장함에 대한 감탄, 희생자들에 대한 숙연함, 라면 한 그릇의 소소한 행복, 도전하는 인간에 대한 경외감, 그리고 자연 앞에서의 겸손함까지. 이 모든 것이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싶다.
내일은 또 어떤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와 설렘을 안고 오늘도 조용히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