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시작한 하루
오늘은 서두르지 않았다. 열여섯 번째 아침을 맞으며 유럽 여행도 이제 어느 정도 리듬이 생겼다. 무엇보다 자유 여행이란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다. 젊은 시절의 빠듯한 일정으로 떠나던 여행과는 확연히 다르다.
오늘의 계획은 그린데발드 피에스트(Grindelwald First)에서 트레킹을 하고, 시간이 허락하면 벵겐(Wengen)까지 둘러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획이란 언제나 융통성 있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지난 보름 동안 충분히 배웠다.
인터라켄 오스트역에서 그린데발드까지는 기차로 이동했다. 스위스의 기차 시스템은 정말 놀랍다. 정시 운행은 기본이고, 산악 지대를 관통하는 철도 기술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린데발드역에 도착해서 피에스트로 올라가는 곤돌라를 탔는데, 이 곤돌라 구간이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해발 1,050미터의 그린데발드에서 2,168미터의 피에스트까지 약 25분간 공중을 날아가는 셈이다.
또 다른 스위스의 참모습
피에스트 정상에 내리자마자 지금까지 보아온 스위스와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융프라우요흐의 빙하 세계도, 마터호른의 웅장함도 좋았지만, 이곳은 더욱 목가적이고 평화로웠다.
더 넓은 초원 위에 수많은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스위스의 고산 목장은 대부분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 위치한다. 이곳의 소들은 주로 브라운 스위스(Brown Swiss) 종으로, 고산 지대의 풀을 먹고 자란 덕분에 육질이 특히 부드럽고 고소하기로 유명하고 한다. 멀리서 보니 초원 사이로 거니는 관광객들이 소들과 함께 노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더욱 신기했다. 수많은 소들이 풀을 뜯으며 내는 방울 소리가 하나의 거대한 오케스트라 같았다. '음메' 하는 소 울음소리, 풀을 뜯는 소리, 목에 건 방울소리가 어우러져 자연이 만들어내는 장엄한 심포니였다. 이런 풍경소리를 독일어로는 'Kuhglocken'이라고 하는데, 스위스 전통 목축의 상징적인 소리라고 한다.
명상 같은 시간
우리는 산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더 넓은 초원이 펼쳐지고, 저 멀리 눈 덮인 융프라우(4,158m)와 묀히(4,107m), 아이거(3,970m) 봉우리들이 장엄하게 서 있었다. 이 세 봉우리는 베르너 오버란트(Bernese Oberland) 지역의 상징이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융프라우-알레치 지역의 핵심이라고 한다. 그 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초원 그 위에 유유히 풀을 뜯는 소떼들.
그 순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풍경 앞에서도 사진을 찍느라, 다음 일정을 걱정하느라 바빴는데, 지금은 온전히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저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자체가 힐링이고 휴식이었다. 마치 명상을 하는 수도승처럼 설산 한번 바라보고 초원 한번 바라보고.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3시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연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스위스
오후 3시라는 시간을 보니 그제야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왔다. 피에스트 정상의 레스토랑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여기서도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을 만났다.
어디에선가 본 글이 생각났다. "융프라우에 가니 지구 인구의 1/3한국 사람, 1/3은 중국 사람, 나머지 1/3은 그 외의 모든 나라 사람들인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 말이다. 오늘도 한국인 관광객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왜 이토록 한국인들이 스위스를 많이 찾을까 혼자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와는 너무 다른 이국적인 자연 풍경 때문이 아닐까. 4천 미터가 넘는 웅장한 산과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초원, 그 초원에서 풀을 뜯는 소떼들, 그리고 푸른 초원 위에 있는 주황색 기와지붕의 집들... 너무나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이 도시에 지친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아닐까.
특히 우리 베이비붐 세대에게는 더욱 특별할 것이다. 전쟁의 폐허에서 시작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온몸으로 경험하며 살아온 세대에게, 이런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은 꿈꿔왔던 이상향과도 같다.
융통성 있는 여행
원래 계획은 벵겐까지 가는 것이었지만, 무리라고 생각했다. 이게 바로 우리 여행이다. 좋으면 더 머물고, 피곤하면 쉬어가면 된다. 젊은 시절처럼 빡빡한 일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여행은 이런 여유로움이 가장 큰 매력이다.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여행 시작 후 처음으로 미국 주식시장 시황을 확인했다. 평소 장기 투자 목적으로 꾸준히 모으고 있던 주식이 내가 생각하는 좋은 가격대로 내려와 있었다. 계좌에 있던 여유 자금으로 추가 매수를 했다. 정말 세상이 좋아졌다. 여행하면서도 투자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프랑스에서 잠시 근무할 때 한국소식을 알려면 파리에 있는 물랭 호텔에가서 며칠간의 신문,아니 구문을 가져와서 열심히 읽던 것을 이야기하면 나를 꼰대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면 전 세계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 여행 중에도 이렇게 소소한 재테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스위스 소고기와 전통 공연
오늘 저녁은 꼭 스위스 소고기를 먹기로 했다. 어제 스위스 축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스테이크를 먹으려고 했는데, 갔던 식당에 스테이크가 없어서 아쉬웠다. 그래서 오늘은 미리 비프 스테이크 요리를 잘하는 식당을 알아놓았다.
스위스 소고기는 정말 특별했다. 고산 지대의 신선한 풀과 허브를 먹고 자란 소들의 고기는 육질이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스위스는 EU 기준보다도 더 엄격한 동물 복지 기준을 적용하고 있어서, 소들이 스트레스받지 않는 환경에서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고기 맛도 더욱 깊고 풍부했다.
저녁 식사 후 시내로 나오니 곳곳에서 나이 드신 분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전통 춤을 공연하고 있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떠올리게 하는 안무라고 했다. 하이디는 1881년 스위스 작가 요한나 슈피리가 쓴 소설로, 전 세계인들이 알고 있는 스위스의 상징적인 캐릭터다.
전통 스위스 나팔인 알펜호른(Alphorn)을 연주하고 요들송(Yodeling)도 들려주었다. 알펜호른은 길이가 3-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나무 나팔로, 고산 지대에서 멀리 소통하기 위해 사용되던 전통 악기다. 요들송은 알프스 지역 특유의 창법으로, 가슴소리와 머리소리를 빠르게 바꿔가며 부르는 독특한 노래다.
이런 공연들이 곳곳에서 이루어지며 관광객들에게 또 하나의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보면서 우리나라의 대금, 소금, 피리, 해금으로 구성된 연주팀을 만들어서 이렇게 거리에서 공연하며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문화를 자연스럽게 관광 상품화하여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되고, 문화 전승에도 기여하는 스위스 사람들의 지혜가 부러웠다. 우리도 전통 음악과 춤을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관광객들에게도 즐거움을 주고 우리 문화도 알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그린데발드 피에스트에서의 하루는 정말 특별했다. 웅장한 자연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을 느끼기도 하고, 동시에 그 자연의 일부가 되어 평온함을 만끽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이야말로 여행의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과거에는 많은 곳을 빠르게 둘러보는 것에 급급했다면, 지금은 한 곳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며 깊이 있게 경험할 수 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계획에 얽매이지 않으며, 그 순간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베이비붐 세대가 누릴 수 있는 은퇴 후 여행의 가장 큰 축복이다.
내일은 또 어떤 새로운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계획은 있지만 그 계획마저도 유연하게 바꿀 수 있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오늘 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