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선물
호수가 품어낸 새벽 햇살이 창문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나를 깨운다. 그 빛 속에는 노르웨이 산맥이 밤새 호수에 새겨놓은 은빛 물결이 춤을 추고 있었다. 어젯밤 나를 가득 채웠던 걱정들이 아침빛과 함께 살짝 누그러진다. 마치 호수의 잔잔한 물결이 내 마음의 주름까지 펴주는 것 같았다.
휴대폰, 보조배터리, 노트북... 하나하나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다행히 모두 충전이 되어 있었다. 이 작은 전자기기들이 여행길에서 얼마나 소중한 동반자인지 새삼 깨닫는다. 집에서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일들이 여기서는 하루를 좌우하는 중요한 일이 된다. 문명의 편리함에 얼마나 의존하며 살고 있었는지, 이런 순간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서둘러 짐을 정리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복도를 걸으며 창밖을 내다보니, 호수 위로 새벽 안개가 신비롭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요정들이 밤새 호수에서 놀다가 하늘로 돌아가는 모습 같았다. 어제 저녁, 배를 타고 들어와야 한다는 불편함 때문에 이 호텔을 선택한 것을 후회했었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커다란 식당에 들어서자 이미 여러 나라에서 온 투숙객들로 북적였다. 창밖으로 펼쳐진 호수의 전망은 그 어떤 고급 호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자연의 거대함 앞에서 나는 작은 존재가 되었고, 그것이 오히려 편안했다.
풍성하게 차려진 조식 뷔페를 바라보며 나는 내 편견을 부끄러워했다. 가격만으로 호텔의 가치를 판단했던 내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어젯밤 호텔 직원들이 선보인 소박한 음악회의 여운도 아직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들의 순수한 열정이 담긴 연주가 어떤 유명한 콘서트홀에서의 공연보다 더 깊은 감동을 주었다. 때로는 불편함 뒤에 예상치 못한 선물이 숨어 있다는 것을, 여행은 이렇게 조용히 가르쳐 준다.
플롬으로의 여정
오늘의 목표는 명확했다. 플롬(Flåm)에서 유명한 산악열차를 타고 노르웨이의 장엄한 자연을 만나는 것. 하지만 인생이 그렇듯 계획이 언제나 현실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사전 예약을 하려 했지만 카드 결제가 계속 실패했다. 화면을 응시하며 몇 번이고 시도해 봤지만 결과는 매번 같았다. 샤모니몽블랑 케이블카 예약 때도 그랬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조였다. 한국에서는 너무나 당연했던 온라인 결제가 여기서는 하나의 도전이 되었다.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이런 장벽들. 하지만 이것 또한 여행의 일부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결국 현장에서 구매하기로 하고 플롬으로 향했다. 때로는 직접 발로 뛰어야만 해결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이번 여행이 계속 일깨워주고 있었다.
플롬역에 도착하니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 오후 늦은 시간 표만 구할 수 있었다. 매표소 직원의 미안한 표정에서 이런 일이 일상다반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방문자센터 직원이 따뜻한 미소와 함께 주변 트레킹 코스를 안내해주었다. 그들의 친절함에 감사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30일 동안 PT 트레이너가 정성스럽게 알려준 치료 운동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 이런 순간에 후회로 돌아왔다. 왼쪽 무릎의 둔한 통증이 마치 내 게으름을 꾸짖는 듯했다. 산행을 할 때마다 내려올 때쯤 찾아오는 그 익숙한 통증.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한 대가였다. 한국에 돌아가면 의학적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건강한 몸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이런 순간에야 절실히 깨닫게 된다.
송네피요르드, 물 위의 시간
그래서 선택한 것이 송네피요르드(Sognefjord) 관광 쾌속보트였다. 구명복을 착용하고 호루라기까지 받아들며 다소 걱정스러워했지만, 30대 초반의 여성 선장이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으로 불안감을 차근차근 덜어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이 피요르드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송네피요르드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길고 깊은 피요르드로, 총 길이가 204킬로미터에 달한다. 빙하기 동안 거대한 빙하가 수만 년에 걸쳐 바위를 깎아내며 만들어낸 자연의 걸작이라는 선장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상상해보았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빙하가 이 땅을 조각했을까. 그 인내와 끈기, 그리고 시간의 위대함에 숙연해졌다. 바이킹들이 이 물길을 따라 항해했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천 년 전 바이킹들도 나와 같은 경외감을 느꼈을까.
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자 두 개의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먼저 만난 운드라달(Undredal)은 겨우 60명 정도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마을 중 하나다. 선장의 목소리에 담긴 자부심이 느껴졌다. 1147년에 지어진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작은 목조 교회가 자리하고 있어 더욱 특별하다. 염소 치즈로 유명한 이 마을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저 작은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을까. 60명이라는 숫자가 주는 따뜻함. 서로의 얼굴을 모두 알고, 삶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그들의 일상이 부러웠다.
스티간(Styrkja)은 더욱 극적인 모습이었다. 가파른 산자락에 단 두 채의 집만이 외롭게 서 있었다. 두 채. 이 척박하고 험난한 곳에서 대대로 삶을 이어온 사람들. 겨울이면 몇 달씩 해를 보지 못하는 이곳에서,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뎌왔을까. 두 집 사이에는 분명 수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서로를 의지하며, 때로는 갈등하며, 그러나 결국 함께 살아남기 위해 손을 맞잡았을 그들의 역사가 보이는 듯했다. 연어와 송어가 풍부한 이 물에서 고기를 잡고, 가파른 산비탈에서 염소를 키우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보트에서 바라본 피요르드의 풍경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장엄함이었다. 1000미터가 넘는 절벽들이 깊푸른 물 위로 우뚝 솟아있고, 그 사이로 실처럼 가느다란 폭포들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바람이 물결을 일으킬 때마다 햇빛이 산산이 부서져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린 듯 반짝였다. 이런 순간에는 카메라도 말도 필요 없었다. 그저 눈에, 마음에 새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플롬 철도, 20년의 기적
오후가 되어 드디어 플롬 철도에 올랐다. 다행히 안내서가 한글로도 준비되어 있어 반가웠다. 이런 작은 배려에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플롬(Flåm)에서 뮈르달(Myrdal)까지, 해발 863미터 높이를 20킬로미터에 걸쳐 오르는 이 철도는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일반 철도 중 하나다.
이 철도가 탄생하기까지는 무려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1923년에 시작된 공사는 1940년에야 완성되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노르웨이인들의 의지가 놀라웠다. 20개의 터널 중 18개를 노동자들이 맨손과 간단한 도구로 뚫어냈다고 하니, 그 험난함을 상상할 수 있다. 하루에 평균 20센티미터씩, 때로는 며칠 동안 단 몇 센티미터밖에 전진하지 못하는 날들도 있었다고 한다.
혹독한 추위와 거친 바위, 그리고 끝없는 절망감과 싸워야 했을 그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다이너마이트가 부족했던 시절, 정과 망치로 바위를 깨트리며 한 발 한 발 전진했을 노동자들. 그들의 손에는 수많은 상처가 있었을 것이고, 마음에는 언젠가는 이 길이 완성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의 끈기와 의지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창밖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첫 번째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마치 다른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깊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강물과 가파른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들은 각각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어떤 것은 굵고 힘차게, 어떤 것은 가늘고 우아하게 흘러내렸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나타나는 새로운 풍경은 마치 자연이 준비한 깜짝 선물 같았다. 기차가 고도를 높여갈수록 아래쪽 풍경이 점점 작아져 갔다. 방금 전까지 우리를 압도했던 거대한 바위들이 이제는 작은 점처럼 보였다. 관점이 바뀌면 세상도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오늘날의 부유한 나라를 만든 노르웨이 사람들의 강인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험난한 자연과 싸우는 대신 그것을 품고 함께 살아가는 지혜. 자연을 정복하려 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려는 그들의 철학이 이 철도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다이너마이트가 부족했던 시절, 노르웨이 사람들의 끈기와 의지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오늘날의 부유한 나라를 만든 노르웨이 사람들의 강인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쇠스폭포의 전설
기차는 쇠스폭포(Kjosfossen)에서 잠시 정차했다. 140미터 높이에서 천둥같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 앞에서 모든 승객이 카메라를 들었다. 그때였다. 웅장한 노르웨이 민요가 울려 퍼지며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바위 위에 나타났다. 그녀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는 노르웨이 전설 속 물의 정령 '후르데(Huldra)'를 재현한 공연이라고 했다. 후르데는 아름다운 노래로 나그네들을 유혹한다는 숲의 요정이다. 폭포의 물보라 속에서 춤추는 그녀의 모습은 환상적이면서도 신비로웠다.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강렬함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여행의 깨달음
하루를 마치며 돌아보니, 아침의 걱정들이 무색해졌다. 예약이 되지 않아 조바심이 났고, 무릎이 아파 트레킹을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결국 더 특별한 경험으로 이어졌다. 배로만 갈 수 있는 호텔에서의 평온한 아침, 피요르드 위를 가르며 만난 작은 마을들, 20년의 노력이 만들어낸 철도 위에서의 감동.
여행이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오히려 더 큰 선물을 주기도 한다. 불편함 뒤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감동. 오늘 하루가 다시 한 번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내일이면 또 다른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계획한 대로일지,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불확실함마저 기대가 된다. 여행이 가르쳐준 소중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