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31일차 - 스탈하임에서 베르겐까지

by 이 범수

뇌뢰이 계곡이 선사한 아침 풍경

창문을 열자 차가운 새벽공기와 함께 뇌뢰이 계곡의 장엄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깊고 푸른 계곡물이 산자락을 따라 굽이치며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니, 어제까지의 여독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런 풍경 앞에서는 누구든 시인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계곡 너머로 솟아오른 웅장한 산봉우리들이 아침 햇살에 금빛으로 반사되는 모습이 마치 신이 만들어 놓은 작품 같이 아름다웠다.

오늘은 베르겐으로 향하는 여행일이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하고 떠나는 것이 아쉬워 잠시 더 창가에 서 있었다. 호텔 프런트에서 주변 관광 안내를 부탁하니 친절한 직원이 호텔에서 불과 50미터 거리에 있는 민속박물관과 뇌뢰이 계곡을 추천해주었다. "아주 특별한 곳"이라며 눈을 반짝이던 그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그의 진심어린 추천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시간이 멈춘 듯한 민속박물관

박물관에 들어서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며칠 전 갬레옐 길에서 보았던과 같은 전통적인 토르프 가옥들이 정성스럽게 보존되어 있었다. 토르프(turf)는 노르웨이어로 '잔디'를 뜻하는데, 지붕에 자작나무 껍질과 잔디를 덮어 만든 전통 주택이다. 이런 건축 방식은 노르웨이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였다고 한다.

잔디 지붕 위에 핀 작은 야생화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 소박한 집들이 수백 년 동안 비바람을 견뎌온 것을 생각하니 경외감마저 들었다. 건물 곳곳에서 풍겨오는 오래된 나무 냄새가 마치 시간의 향기 같았다.

작은 건물 안에는 낡은 농기구들과 도구들이 있었다. 나무로 깎은 쟁기, 손으로 짠 바구니. 하나하나가 모두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생활의 흔적들이었다. 이런 소소한 생활 도구들 하나하나에 담긴 삶의 무게가 느껴져 가슴이 뭉클해졌다. 박물관을 나오며 현대의 편리함에 감사하는 마음과 동시에 옛사람들의 소박하지만, 진실한 삶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속에 피어났다.

국민시인 페르와의 만남

뇌뢰이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에 우뚝 선 기념비가 우리를 맞이했다. 페르 오브레(Per Ove) 기념비였다. 이 분은 노르웨이의 국민시인으로, 1841년 플롬에서 태어나 스탈하임으로 이주해 평생을 이곳에서 보낸 인물이다. 그는 스탈하임 호텔 아래 작은 오두막집에서 성장하며 노르웨이의 자연과 민중의 삶을 노래했다고 한다.

"산은 영원하고 사람은 지나가지만 사랑은 남는다“ 페르의 시구처럼, 이곳에서도 그의 사랑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평생 사랑했던 시인의 마음이 이 기념비를 통해 전해져 오는 듯했다.

기념비에 새겨진 그의 초상을 바라보니 왠지 친근한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창한 업적보다는 자신의 터전을 묵묵히 사랑하며 살아간 페르의 소박한 삶이 더욱 값지게 여겨졌다. 그리고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스탈하임슬레이비, 노르웨이 최고의 구불길

페르 기념비에서 조금 더 내려가니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스탈하임슬레이비(Stalheimskleivi) 도로였다. 마치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구불구불한 이 길은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산악도로 중 하나로, 1842년에 처음 건설되었다고 한다.

14개의 날카로운 헤어핀 커브와 최대 경사 20%라는 수치만으로도 이 길의 험난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이 도로를 "노르웨이 도로 건설사의 진정한 걸작"이라고 자랑스럽게 부른다고 한다. 실제로 이 길을 뚫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곡괭이와 삽만으로 바위를 깎아낸 것을 생각하니, 그들의 끈기와 의지가 새삼 경이로웠다.

길 아래로 내려다본 뇌뢰이 계곡은 유명한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못지않게 깊고 아름다웠다. 계곡 물이 햇살에 반짝이며 흘러가는 모습을 보니, 왜 이곳이 숨겨진 보석 같은 여행지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자연풍광에 취해서 정신없이 내려갔는데 경사 20% 되는 구불구불한 z코스의 가파른 길을 다시 올라 오느라 힘이 많이 들었다. 굉음을 내며 달리는 오트바이가 부럽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차량통행도 금지인걸 보니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노르웨이인들도 이 길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는가 보다. 180년 전 이 길을 처음 만든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험준한 바위벽을 마주하고도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의 용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장관을 선사해준 것이라 생각 하니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바이킹의 흔적을 찾아서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바이킹 마을로 향했다. 이곳은 산에서 흘러내린 빙하수와 송네 피오르드가 만나는 지점으로, 플롬으로 가는 피오르드 크루즈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지리적으로 보면 바이킹들이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요한 거점이었을 것이다.

마을에 들어서니 천 년 전 바이킹 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거친 수염을 기른 바이킹 무사들이 갑옷을 입고 칼 대결을 시연하는 모습이 실감이 났다. 쇳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관람객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연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진짜 전투를 보는 것처럼 손에 땀이 났다.

관광객들을 위한 활쏘기 체험장에서는 아이들이 신나게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작은 아이가 과녁을 맞히자 부모가 기뻐하며 박수치는 모습을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대장간에서는 실제로 철을 달구어 도구를 만드는 시연이 이어졌다. 뜨거운 불길과 망치질 소리가 어우러져 마치 천 년 전 바이킹 마을의 생생한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도끼 던지기 체험이었다. 바이킹들의 주요 무기였던 도끼를 던져보니 생각보다 무겁고 다루기 어려웠다. 이런 도구로 바다를 건너 새로운 땅을 개척했던 바이킹들의 용기와 모험정신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마을 한편에는 바이킹 시대의 집을 재현 해놓은 곳도 있었다. 어둡고 좁은 실내에 들어서니 그들의 소박했지만 강인했던 삶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살며 바다를 정복한 바이킹들의 정신력이 경이로웠다.

험준한 산길이 알려준 삶의 지혜

베르겐으로 가는 길은 상상 이상으로 험했다. 크고 작은 터널들을 셀 수 없이 많이 지나면서, 노르웨이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터널 하나하나가 모두 바위를 뚫고 만든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라르달 터널은 24.5킬로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긴 도로 터널이라고 한다. 2000년에 완공된 이 터널을 만들기 위해 20년이 걸렸다니, 노르웨이 사람들의 끈기가 새삼 대단하다고 느꼈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 하나하나의 터널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숨어 있었다. 때로는 지루할 정도로 긴 터널을 지나면서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인간의 의지력에 경외감을 느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험준한 산들을 보며 생각했다. 만약 노르웨이가 가난한 나라였다면, 누군가는 이런 척박한 자연환경 탓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주어진 환경을 원망하는 대신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우리가 사는 땅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새삼 감사하게 되었다. 동시에 잘 사느냐 못 사느냐는 주어진 환경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보여준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이루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베르겐의 젊음이 주는 활력

베르겐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 겸 시내 구경을 나섰다. 베르겐역 맞은편 광장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어떤 이들은 공을 차며 놀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조깅을 하고 있었다.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춤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젊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자유분방하면서도 활기 찬 그들의 에너지가 우리에게도 전해져 왔다. 나이가 들수록 소중해지는 것은 건강과 함께 이런 순수한 열정인 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광장 한쪽에서는 아빠와 어린 아들이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젊은 커플이 벤치에 앉아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모든 풍경이 어우러져 베르겐의 첫 밤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31일차의 하루가 저물어간다. 뇌뢰이 계곡의 고요한 아침부터 베르겐의 활기찬 밤까지, 노르웨이는 오늘도 우리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안겨주었다. 내일은 또 어떤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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