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32일차 - 베르겐에서 마주한 따뜻한 발견들

by 이 범수


아침 햇살이 베르겐 시내를 부드럽게 감싸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의 계획을 차근차근 정리해 보았다. 구글 지도에 방문할 곳들을 하나씩 입력하면서, 32일간의 여행이 벌써 이렇게 흘러왔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효율적인 동선을 고려해 첫 번째 목적지로 해양박물관을 선택했는데,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베르겐의 첫인상은 아름답고 활기차 보였다.

저 멀리 언덕에 자리잡은 집들이 마치 동화책 속 그림처럼 울긋불긋 파랑, 노랑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이 화려한 색채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베르겐만의 독특한 문화적 표현이라고 했다. 북유럽의 긴 겨울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해주기 위해 시작된 이 전통은, 18세기부터 한자동맹의 무역상들이 자신들의 창고와 상점을 구분하기 위해 각기 다른 색으로 칠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이어진 이 아름다운 전통은 베르겐을 '북유럽의 보석'이라 부르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단다.

바다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베르겐 대학 한편에 자리한 해양박물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노르웨이 사람들이 바다와 얼마나 깊은 인연을 맺고 살아왔는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단순히 배의 기술적 발전사만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었다. 선원들의 생활상, 그들이 긴 항해를 떠나며 고향에 남겨둔 가족들의 이야기, 바다에서 겪었던 고난과 희망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1856년에 그려진 선박 도면이었다. 손으로 그려진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한 그 도면을 보며, 과거 현역 시절 선박용 제품을 공급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 대부분의 선박용 부품 기술 규격과 인정 규정이 노르웨이 기준을 따르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바이킹의 후예들이 쌓아 올린 해양 기술의 깊이와 전통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한 켠에 전시된 어느 선원의 편지가 특히 마음을 울렸다. 1920년대에 쓰여진 그 편지에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오늘도 북극해의 거친 파도와 씨름하고 있소. 하지만 당신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어떤 추위도 견딜 수 있소"라는 구절이 있었다.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숭고하고 애틋했는지가 절로 느껴졌다.

예술혼이 살아 숨쉬는 공간

베르겐 국립미술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기대감으로 가벼웠다.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1층과 2층에 펼쳐진 전시는 충분히 마음을 충족시켜 주었다. 특히 운 좋게도 2층 전체에서 진행되고 있던 하리에트 바커(Harriet Backer)의 특별 전시는 예상치 못한 선물과 같았다.

하리에트 바커는 19세기 후반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여성 화가였다. 뭰헨과 파리에서 수학한 그녀는 인상주의 기법을 노르웨이의 정서와 절묘하게 결합시킨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냈다. 특히 실내 풍경화에 뛰어났던 그녀의 작품들을 보며, 한 여성이 당시 남성 중심의 화단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으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갔는지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푸른 실내(Blått interiør, 1883)'는 단순한 실내 공간을 그린 것이지만, 창문으로 스며드는 은은한 빛과 파란색 톤이 만들어내는 고요한 분위기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평온함을 선사했다. 그 앞에 서서 한참을 머물렀는데, 그녀가 화폭에 담고자 했던 것이 단순히 사물의 모습이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과 분위기였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1층의 덴마크 왕립 도자기 공장 작품들은 또 다른 감탄을 자아냈다. 1775년에 설립된 이 공장은 유럽 도자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시된 작품들 중에서도 꽃잎을 생화처럼 사실적으로 재현한 화병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정교하게 만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섬세한 기법이었고, 여인의 화려한 의상을 표현한 인형들은 실제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입맛을 되살려준 바다의 선물

어시장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눈이 번쩍 뜨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근 30일 가까이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로 인해 입맛을 잃어가고 있던 터였다. 과거 장기 해외 출장을 다닐 때면 이런 경우 한국 식당이나 중국 식당을 찾아 한 끼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나면 며칠은 버틸 수 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스위스에서는 다행히 라면이라도 구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식당을 멀리하게 되었고, 가끔 요케르(Joker) 마트에서 입에 맞는 음식을 사서 공원 벤치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 우리에게 베르겐의 어시장은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싱싱한 연어, 대구, 새우들이 얼음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침이 고였다. 시장 상인의 권유로 갓 잡은 연어 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그 맛은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진짜 음식의 맛이었다. 바다 내음이 그대로 살아있는 연어의 부드러운 살결과 적당한 간이 어우러져, 지난 며칠간의 허기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아내도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식사를 마쳤다.

새로운 계획, 새로운 각오

점심 식사 후 관광안내소를 방문한 것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트롤퉁가 트레킹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확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상담을 받고 나니 커다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현재의 나의 무릎 상태를 고려할 때 무리한 계획은 절대 금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롤퉁가는 편도 11킬로미터의 험난한 트레킹 코스로, 노르웨이에서도 상급자 코스로 분류되는 곳이다. 해발 1,100미터의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리세피오르드의 절경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준다고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고 체력을 요하는 곳이기도 하다.

고민 끝에 우리는 계획을 대폭 수정하기로 했다. 트롤퉁가를 마지막 목적지로 돌리고, 상대적으로 접근이 쉬운 프레이케스톨렌(설교단바위)과 쉐락볼턴을 먼저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트롤퉁가에서 중도에 포기해야 한다면 다음 계획들도 모두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마음이 무거워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장한 각오가 서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의 의미는 마지막 세 곳의 성공 여부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2일간의 여행이 진정으로 완성되려면, 노르웨이 대자연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와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겼다.

작은 기쁨, 큰 위로

하루를 일찍 마무리하기로 하고, 아내가 필요한 생활용품을 사러 호텔 근처 쇼핑센터에 들렀다. 그런데 그곳에서 반가운 것을 발견했다. 라면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봉지 라면이라 조리해서 먹을 수는 없어서 사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그 옆에 놓여있던 컵떡볶이 두 개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작은 컵떡볶이 하나가 이렇게 소중하게 느껴질 줄이야. 이것만 있으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는 든든하게 잃어가는 입맛을 되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때로는 이런 작은 발견들이 먼 타국에서 외로움을 달래주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베르겐의 저녁 풍경이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 화려한 색깔의 집들이 노을빛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일부터 시작될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지만, 오늘 하루 베르겐에서 만난 따뜻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들이 우리에게 큰 힘을 주었다.

바이킹의 후예들이 천 년 넘게 일궈온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우리는 단순히 관광객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여행자로서 소중한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다. 32일째를 맞은 이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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