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33일차 - 베르겐에서 요프란으로의 긴 여정

by 이 범수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호텔 식당이 문을 열자마자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른 시각에 베르겐을 떠났다. 오늘은 이번 여행 중 가장 긴 이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겐에서 요프란까지, 구글 지도는 5시간 반이라고 알려주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실제로는 7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프레이케스톨렌 하이킹을 위한 전초기지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이제 정말 힘든 마지막 일주일의 여행을 아름답게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든다.

노르웨이의 놀라운 시스템

이틀 동안 공영 주차장에 세워두었던 차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노르웨이의 진보된 시스템을 경험했다. 아무런 확인 절차도 없이 그냥 차를 몰고 나올 수 있었다. 'Easy Parking System'이라는 것이 작동해서 노르웨이에서 대여한 모든 차량은 자동으로 체크되어 렌터카 회사를 통해 사후 청구가 된다고 한다. 스위스에서 코인을 찾아 헤매며 주차료를 지불하던 번거로움과 비교하면 정말 편리한 시스템이었다. 이런 작은 것에서도 이 나라의 효율성과 신뢰 사회의 면모를 엿볼 수가 있었다.

끝없는 터널과 바이킹의 혼

베르겐 시내를 벗어나자 또 다시 끝없는 터널이 이어졌다. 조금 달리다 보니 이번에는 페리를 타라는 안내가 나타났다. 이런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적응이 쉽지가 않았다. 답답한 터널 속을 끊임없이 달리고, 때로는 바다 밑을 가로지르는 해저터널, 때로는 구름 위를 지나는 듯한 높은 산을 넘어가고,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페리까지.

이 모든 것들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이것은 결코 환경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노르웨이 국민들의 열정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다. 이런 척박하고 험준한 환경이 바로 강인한 바이킹족을 만들어낸 것이구나. 해안가 곳곳에 정박해 있는 수많은 고급 요트들을 보면서 이들이 얼마나 강한 정신력으로 부를 일구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인지 상상할 수 있었다.

자전거와 의지의 힘

이곳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 하이킹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내 경험으로는 자전거가 많은 도시는 대부분 평지나 분지형 도시였다. 산악 지형이 많은 도시에서는 자전거 이용자가 거의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노르웨이는 자전거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특히 높고 가파른 산을 자전거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굉장히 많이 볼 수 있었다. 자전거를 통해서 환경를 극복하는 정신력을 기르는게 아닐까 싶으면서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의지가 문제구나.'하는 생각이들었다.

나는 평소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중 가장 값진 것이 가난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가난했기 때문에 절약이 몸에 배었고, 성실하게 살아야 했다. 어릴 때는 그것이 힘들고 불편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가난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고자 더 열심히 살아왔고 그것이 나의 습관이 되었던 것 같다. 노르웨이 사람들의 모습에서 바로 그런 정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길

땅속으로, 바다 밑으로, 산 위로, 바다 위로 달려오며 남부 지방으로 내려올수록 도로 사정이 점점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편도 1차선이지만 중앙선이 명확히 그어져 있었고, 도로의 전체 폭도 북쪽의 도로보다는 훨씬 넓어 보였다. 북쪽에서는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조심스럽게 속도를 줄이면서 운전했는데, 이곳에서는 그렇게까지 위축되지 않고도 운전을 할 수가 있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할 것 같아서 우리는 스타방에르에서 잠시 관광하고 호텔로 가기로 했다.

스타방에르 - 석유와 역사의 도시

노르웨이 석유 박물관

스타방에르는 노르웨이 석유산업의 중심지답게 인상적인 석유 박물관이 있었다. 내가 퇴직한 회사도 석유와 가스 분야의 비중이 컸기에 관련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지만, 실제로 보니 이 정도로 엄청난 장비와 험난한 작업 과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북해의 거친 파도와 혹독한 추위 속에서 해상 석유 시추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1960년대 말 노르웨이가 어떻게 석유를 발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전시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1969년 12월 23일, 에코피스크 유전의 발견은 노르웨이를 세계적인 석유 부국으로 만든 역사적 순간이라고 한다. 그 험난한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 기름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자동차가 달리고 있다는 생각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구시가지의 하얀 보석들

18세기에 형성된 구시가지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했다. 하얀 목조 건물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은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이 지역은 'Gamle Stavanger(올드 스타방에르)'라고 불리며, 18-19세기 어업과 통조림 산업으로 번영했던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좁은 자갈길을 따라 걸으며 하나하나의 집들을 바라보았다. 각각의 집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흰색으로 조화로운 통일감을 이루고 있었다. 창문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 있어 하얀 벽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천년의 기도가 스며든 대성당

스타방에르 대성당은 북유럽 전체에서 가장 잘 보존된 1100년대의 건물이라고 한다. 1125년에 건립된 이 대성당은 거의 900년의 세월을 견디며 이 도시의 정신적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외관도 인상적이었지만, 대성당 내부도 매우 웅장했다.

대성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 소리가 높은 천장을 울리며 퍼져나갔다. 그 소리는 마치 천년의 기도가 한순간에 밀려오는 듯한 감동을 주었다. 내부 장식은 매우 강렬한 색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깊은 파란색, 금색, 붉은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벽화들과 스테인드글라스는 중세의 신앙심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문득 어제 베르겐에서 본 하리에트 바커(Harriet Backer)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그 강렬하면서도 따뜻한 색채들이 바로 이런 노르웨이 전통 건축물 내부의 색감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예술가의 영감은 삶 속에서, 일상 속에서 나오는 것이구나.

오일 카페 골목의 여유

석유 박물관 근처에는 'E Café'라는 독특한 이름의 골목이 있었다. E Cafe 앞은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갤러리들로 가득했다.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이 어우러져 여유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작은 테이블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오늘 하루를 돌아보았다. 새벽부터 시작된 긴 여정, 노르웨이의 놀라운 인프라, 그리고 이들의 불굴의 정신력까지. 하루 종일 많은 것을 보고 느꼈지만, 무엇보다 깊이 새겨진 것은 환경을 핑계로 하지 않고 의지로 모든 것을 극복해내는 이들의 모습이었다.

여행의 끝을 향해

이제 정말 마지막 일주일이다. 내일이면 드디어 프레이케스톨렌 하이킹에 나선다. 수직 절벽 위 600미터 높이의 바위에서 리세피오르드를 내려다보는 그 순간을 상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늘 하루 동안 본 것들, 느낀 것들이 마음속에서 차곡차곡 정리되고 있다. 베르겐에서의 마지막 아침, 끝없는 터널과 페리, 스타방에르의 하얀 집들과 천년 대성당, 그리고 석유 박물관에서 본 인간의 도전 정신까지.

여행이 끝나가고 있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경험들이 내 안에 소중한 보물로 남을 것이라는 확신도 든다. 특히 '환경이 아니라 의지'라는 깨달음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큰 힘이 될 것 같다.

내일은 또 어떤 감동이 기다리고 있을까. 노르웨이의 마지막 여정을 향해 마음을 다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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