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34일차 - 프리케스톨렌의 감동

by 이 범수


아침의 설렘과 작은 기다림

토요일 아침, 호텔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커피 향과 함께 하루가 시작되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 늦은 8시 조식이 조금은 아쉬웠지만, 오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프리케스톨렌을 생각하니 마음은 벌써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3대 트레킹 코스 중 하나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어제 밤 호텔을 선택할 때의 신중함이 빛을 발했다. 프리케스톨렌과 가까운 거리에 자리 잡은 덕분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도 비교적 일찍 트레킹 출발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벌써 만원에 가까운 차들을 보니, 이곳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배려가 깃든 등산로

프리케스톨렌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특별했다. 수많은 계단이 이어져 있었지만, 그 높이가 일반적인 건물의 계단보다 낮게 설계되어 있어 등산객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었다. 작은 배려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결코 작지 않았다. 이 돌계단 하나하나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노르웨이 사람들의 세심함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발걸음이 가벼워진 것은 비단 계단 때문만이 아니었다. 등산로 곳곳에서 들려오는 친숙한 한국말 소리가 귀에 닿았다. 35일 동안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의 유명 트레킹 코스만을 돌아다닌다는 한국인 일행을 만난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쉐락볼튼을 어제 다녀왔다며, 소중한 정보들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같은 나라 사람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특별하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같은 산을 오르며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신이 빚은 걸작품 앞에서

두 시간 정도 올라갔을까.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발걸음이 멈췄다. 커다란 호수와 기암절벽이 만들어낸 장관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었다. 프리케스톨렌, 즉 '설교자의 바위'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곳은 마치 거대한 자연 성당 같았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아찔한 높이였다.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다보니 오금이 저렸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걸어가고 있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곳에 서니 자연이야말로 어떤 천재적인 예술가보다도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만 년의 세월이 빚어낸 이 절경 앞에서 우리는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지만, 그 어떤 사진도 이 순간의 감동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음악으로 이어진 마음들

시계를 보니 일찍 서둘러 온 덕분에 아직 정오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로 붐비는 유명 포토 스팟을 피해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며칠 동안 바쁜 일정에 쫓겨 소홀했던 대금을 꺼내들었다. 오랜만에 만지는 악기는 처음에 청아한 소리를 내주지 않았다. 마치 오랜 친구와의 재회처럼 서로에게 다시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참을 소리 연습을 한 후 본격적인 연주를 시작했다. 고요한 자연 속에서 울려 퍼지는 대금 소리는 평소보다 더욱 깊고 울림이 있었다. 비교적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연주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다가와 사진과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들려오는 박수 소리는 이 험준한 산 위에서 듣기에는 너무도 따뜻했다.

"일본에서 오셨나요? 사쿠하치인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었다. 나는 정중히 한국에서 왔으며, 이 악기는 대금이라는 한국 전통 악기라고 설명했다. 대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대금 명인이 100% 수작업으로 제작한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였다.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한 사람은 자신은 핀란드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나도 오로라 관광을 위해 겨울에 핀란드를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11월이 좋은 계절이라며 그 시기에도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확률이 50% 정도라고 상세히 알려주었다. 낯선 땅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의 이런 정보 교환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음악이 만들어낸 우정

약 한 시간 정도 연주를 마치고 더 높은 바위로 올라가 아내와 함께 또 다른 절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다가왔다. 자신을 노르웨이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대금 연주를 잘 들었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자신은 첼로를 연주하는데, 다음에 이곳에 올 때는 첼로를 가져와서 연주해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의 아이디어가 정말 좋다며 꼭 한번 실행해보라고 격려했다.

프리케스톨렌에서 들려올 첼로 선율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렜다. 음악은 정말 국경과 언어를 초월하는 것 같다.

하산길에서도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한 사람이 다가와서 내가 연주할 때 사진을 찍지 못했다며, 한 번만 포즈를 취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나는 기꺼이 대금을 다시 꺼내어 반주 없이 아리랑을 연주했다. 그들은 파키스탄과 노르웨이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그 순간 깊이 느꼈다. 국적도 인종도 다르지만,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고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노르웨이의 높은 산 위에서 한국의 전통 음악이 울려 퍼지고, 그것을 파키스탄 사람이 감동하며 듣는 이 순간이야말로 작지만 진정한 문화 교류가 아닐까 싶었다.

자연에 대한 겸손함

정상에서 3시간 정도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하산을 시작했다. 올라올 때는 괜찮았던 왼쪽 무릎이 조금 걱정되었다. 하산할 때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다행히 큰 탈 없이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다.

이번 산행을 통해 다시 한번 다짐했다. 자연 앞에서는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아무리 경험이 많고 체력이 좋다고 해도, 자연은 한 순간에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었다.

작은 행복, 큰 만족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아시아 식품 마켓에 들렀다. 라면, 우동, 김치만두 등 그동안 그리웠던 음식들을 한아름 구입했다. 이틀 전 베르겐 어시장에서 31일 만에 먹었던 스시가 정말 맛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국 음식에 대한 허전한 욕구를 완전히 달랠 수는 없었다.

호텔에는 다행히 공동으로 사용할수 있는 간이 주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전자레인지, 커피포트 같은 기본적인 조리 기구들이 비치되어 있어 간단한 요리는 할 수 있었다. 주요 트레킹 코스 주변의 호텔답게 등산객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라고 생각이 되었다.

오랜만에 입에 맞는 음식을 먹으니 몸과 마음이 모두 따뜻해졌다. 여행의 묘미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익숙한 맛이 주는 위안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프리케스톨렌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자연의 웅장함 앞에서 느낀 경외감, 음악을 통해 만난 새로운 친구들, 그리고 작은 일상의 행복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던 하루였다. 내일은 또 어떤 새로운 경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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