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35일차 - 요플란드에서 만난 소중한 쉼표

by 이 범수

아침의 마음 흔들림과 지혜로운 선택

새벽 공기가 차갑게 스며드는 요플란드의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나며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 어제 프리케스톨렌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단체 여행객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들은 트롤퉁가, 쉐락볼튼, 프리케스톨렌을 각각 당일치기로 다녀온다고 했다. 우리도 어제 일찍 호텔로 돌아와 충분한 휴식을 취했으니, 혹시 좀 더 도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잠시 고민한 후,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우리는 이곳에 산악 훈련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자연과 문화를 배우며, 무엇보다 내일을 위해 컨디션을 조절하고 무릎을 보호하자는 원래의 계획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때로는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앞만 보고 달리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 법이다.

천천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호텔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쉐락볼튼으로 가기 위한 호텔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굳이 서둘러 이동할 필요도 없었다. 호텔에서 알려준 요플란드 주변 관광 코스를 따라가며 이 작은 마을이 간직한 이야기들을 천천히 들어보기로 했다.

역사 속으로의 시간 여행 -베르스크호텔렛의 숨겨진 이야기

요플란드의 주요 명소를 소개하는 안내판 앞에 서서,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지난 이틀 동안 머물렀던 베르스크스호텔렛(Verkshotellet)이 바로 그 안내판에 소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이 건물은 오래전 독일이 이곳에 철강공장을 운영했을 때 독일 철강공장 노동자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던 곳이라고 했다.

20세기 초, 노르웨이의 풍부한 수력 자원을 이용한 전기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독일 등 유럽 각국의 기업들이 노르웨이에 알루미늄 제련소와 철강 공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요플란드도 그런 산업 발전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고 한다. 독일 노동자들이 고향을 떠나 이 먼 북구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던 그 시절, 이 건물은 그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유서 깊은 역사가 스며있는 건물에서 우리가 이틀이나 머물렀다는 사실에 새삼 감동이 밀려왔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호텔의 엘리베이터였다. 현대식 엘리베이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아는 엘리베이터는 문이 이중으로 되어있지만, 이 호텔의 엘리베이터는 문이 하나뿐이었고, 무엇보다 원하는 층에 도착할 때까지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어야 했다. 호기심이 발동해 종업원에게 언제 만들어진 엘리베이터인지 물어보았지만,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오래된 엘리베이터가 정말 잘 관리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깨끗하게 유지되어 현재도 아무런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노르웨이 사람들의 꼼꼼하고 성실한 관리 정신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잃고 찾은 작은 발견들

호텔에서 소개해준 작은 섬을 찾아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고 그곳으로 향했지만, 섬과 연결되는 다리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차를 몰고 몇 바퀴를 돌아도 마찬가지였다.

섬에 가는 것을 일단 포기하고, 우리는 요트 선착장 주변의 예쁜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항구 전체를 메우고 있는 요트들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비키니 차림으로 수영을 즐기고 있는 한 쌍의 연인이었다.

오늘 날씨 예보는 14도를 알리고 있었고, 바람도 제법 불고 있었다. 나는 며칠 전부터 계속 긴팔 옷을 입고 있는데, 이런 날씨에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문득 춥고 더운 것을 느끼는 것은 절대 기온이 아니라 상대적인 기온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과 여름의 기온 차에 따라 덥다고 느끼고 춥다고 느끼는 것이리라. 예전에 인도 친구들이 30도에도 춥다며 긴팔 옷을 입는 것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결국 우리가 느끼는 온도는 몸이 적응한 환경과의 상대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이 알려준 길, 마음을 열어준 만남

마을을 구경하고 있는데, 13-14세 정도로 보이는 아이 둘이 선착장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들과 낚시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섬에 가는 방법을 물어보니, 너무나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우리나라 나이로 보면 중학교 1, 2학년 정도 되는 아이들인데, 영어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모습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르웨이의 교육 시스템은 어린 나이부터 영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했다. 특히 북유럽 국가들은 자국어와 영어의 언어적 유사성, 그리고 영어 매체에 대한 개방적인 접근 덕분에 아이들이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아이들의 친절하고 자연스러운 설명 덕분에 우리는 드디어 그 신비로운 섬으로 갈 수 있었다.

요르펠란스홀멘 - 북구의 숨겨진 보석

아이들이 알려준 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요르펠란스홀멘이라는 작은 섬이었다. 이 작은 섬은 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지금까지 웅장하고 장엄한 산들만 보아왔는데, 이 섬은 너무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해변을 걸으며 마치 우리나라의 어느 친근한 해변을 거닐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노르웨이에서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잔잔하고 평온한 감정이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

요르펠란스홀멘은 작자만 요플란드 지역의 대표적인 휴양지 중 하나로,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작은 낙원이라고 한다. 이 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 후반부터 지역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바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휴식을 찾는 문화가 생겨났고, 이 작은 섬은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고 한다.

20세기 중반 들어서는 지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가족 단위의 레크리에이션 시설들이 체계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는데 노르웨이 특유의 '야외 생활' 문화가 반영된 결과였다. 이는 단순히 자연을 즐기는 것을 넘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삶의 철학이 담긴 개념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소박한 행복

섬 곳곳에는 바비큐를 할 수 있는 설비들이 잘 갖춰져 있었고, 군데군데 가족끼리 모여서 음식을 나누며 휴식을 즐기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그 풍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로웠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어린 손자, 손녀까지 삼대가 함께 모여 앉아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모습에서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특히 내 눈을 끈 것은 섬 곳곳에 설치된 낯선 시설물들이었다. 한 가족이 이 시설물들을 이용하는 게임을 즐기고 있었는데, 무엇인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프리스비 골프라고 했다.

이 게임의 매력은 나이에 상관없이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특별한 기술이나 체력이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집중력과 정확성을 기를 수 있어 아이들의 교육적 효과도 크다고 했다. 무엇보다 자연 속에서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면서 소통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된다는 것이 노르웨이 사람들이 이 게임을 사랑하는 이유인 것 같았다.

작은 섬에 담긴 큰 지혜

작은 섬이었지만, 주민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시설과 놀이기구들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었다. 무엇보다 주민들이 산책하기 좋은 환경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지 않고,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도시 계획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들은 개발과 보존 사이의 균형을 잘 잡는다. 필요한 시설은 충분히 갖추되, 자연의 본래 모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화롭게 배치한다. 또한 모든 연령대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포용적인 관점이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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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마무리, 마음 속에 새겨진 풍경들

오늘 하루는 거창한 트레킹이나 모험 대신, 작은 마을의 소소한 일상을 엿보며 보냈다. 때로는 이런 여유로운 시간이 웅장한 자연의 경이로움만큼이나 소중한 기억이 되기도 한다. 역사가 스며있는 호텔에서의 하룻밤, 친절한 아이들이 알려준 길, 그리고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평화로운 섬의 풍경들이 마음 속 깊은 곳에 따뜻하게 자리 잡았다.

요르펠란스홀멘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후, 우리는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 내일은 드디어 쉐락볼튼을 향한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쉐락볼튼은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 중 하나로, 해발 1,084미터 높이의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리세피오르드의 장관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바위 끝부분이 마치 설교단 처럼 생겨서 '설교대 바위(Preikestolen)'라고도 불리는 프리케스톨렌과는 또 다른 매력을 볼수 있을 것 같다.

호텔 방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내일의 여정에 대한 기대감이 조용히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늘 요르펠란스홀멘에서 느꼈던 고요하고 평온한 감정들이 내일의 모험에도 좋은 동반자가 되어줄 것 같다. 여행이란 단순히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작은 순간들, 그리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지혜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내일을 위한 충분한 휴식과 함께 오늘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가슴 깊이 간직했다. 때로는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지혜가, 앞만 보고 달리는 용기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하루였다. 내일의 쉐락볼튼에서 펼쳐질 새로운 감동을 위해, 오늘은 이렇게 조용히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완벽한 준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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