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36일차: 쉐락볼튼의 감동

by 이 범수


새벽 6시, 스타방에르에서의 출발

스타방에르의 호텔 창문 밖으로 북유럽의 짧은 여름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오늘은 쉐락볼튼(Kjeragbolten) 등반의 날이다. 이 신비로운 이름을 가진 바위는 노르웨이어로 '쉐라그의 바위덩어리'라는 뜻이란다. 1,084미터 높이의 쉐라그 절벽에 기적처럼 끼어있는 5㎥ 크기의 바위 하나가 전 세계 모험가들의 성지가 된 것이다.

호텔에서 6시부터 제공하는 아침 식사는 우리 같은 등반객들을 위한 배려였다. 간단하지만 든든한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쉐락볼튼 등산로 입구까지는 스타방에르에서 2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다. 이 도시는 노르웨이의 석유 수도로 불리지만, 동시에 자연을 사랑하는 이들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고 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노르웨이의 산악 풍경은 한국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36일간의 유럽 여행을 하면서 북쪽의 험한 산악도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구불구불한 길도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도로에 나와 있는 양떼들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들이 천천히 길을 건널 때까지 기다리며, 이곳 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엿볼 수 있었다.

자연만 있는 곳에서의 만남

오전 9시를 조금 넘겨 주차장에 도착했다. 간식용 초콜릿이라도 사려 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빵 하나라도 구하려 했으나 유일한 식당은 11시에 문을 연다고 했다. 등산 스틱을 대여해주는 현지인이 우리에게 한 말이 인상 깊었다.

"이곳은 자연만 있습니다."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나는 곧 깨닫게 될 것이었다.

오전 9시 30분, 드디어 등산을 시작했다. 이정표는 쉐락볼튼까지의 거리가 4.9킬로미터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주는 안도감은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사라졌다. 시작하자마자 가파른 바위산을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암벽 사이에 박힌 말뚝에 걸쳐진 쇠사슬을 잡고 산을 올랐다. 마치 내가 전문 암벽등반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있었다. '서두르지 말자. 다치면 큰일난다. 안전이 제일이다.'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올랐다.

바위의 대륙에서 깨닫는 것들

악전고투 끝에 첫 번째 산의 정상 부근에 도착했다. 그곳부터는 평평한 지형이 나왔다. 하지만 온 산이 바위덩어리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구가 흙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지구가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한참을 걸어가니 바위를 쌓아서 만든 작은 건물이 나타났다. 확인해보니 비상시를 대비한 대피소였다. 이런 거친 자연환경에서도 등반객들의 안전을 생각하는 세심함이 느껴졌다.

가도 가도 끝없는 암석지대였다. 군데군데 누군가가 쌓은 돌탑들이 눈에 띄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돌로 탑을 만들고 소원을 비는 것은 같은 모양이다. 아내도 그 탑 위에 돌을 하나 얹으며 우리 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빌었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바위산을 걷다 보니 오래전 중국에서 만났던 스웨덴 공장장과의 대화가 생각났다. 서로 상대방 나라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던 중, 내가 "스웨덴은 국토가 얼마나 큰가요? 그렇게 큰 국토를 가지고 있으니 참 좋겠네요"라고 하자, 그가 "쓰지도 못하는 땅이 크면 뭘 해요?"라고 답했던 것이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할 것 없으면 나무라도 심어서 목재를 생산하면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오늘에야 그 스웨덴 공장장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산들이 암석덩어리였으니까.

길을 잃을 수 있는 곳

4.9킬로미터의 90%는 암석 위를 걸어가는 것 같았다. 어제 인터넷에서 미리 정보를 찾아보니 "쉐락볼튼 산행 시 T자 이정표만 따라가면 된다"고 했다. 처음엔 '수많은 관광객들이 다녀서 길이 생겼을 텐데 왜 저런 이야기를 하지?' 했다. 분명 사람이 다니는 길이 확연히 생겨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 발자국이 다닌 길이 없었다. 모두가 암석 위를 걸어가기 때문이었다. T자 표시가 없으면 누구나 조난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경험만으로는 통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정상에서의 감격

드디어 쉐락볼튼까지 0.3킬로미터라는 이정표가 나왔다. 시계를 보니 12시였다.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너무 기뻤다. 남들과 같은 시간에 도착했고, 무릎 상태도 등산 스틱 덕분인지 아주 양호했다.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쉐락볼튼 정상에 도착했다. 이런 웅장한 자연의 작품을 만들어낸 조물주에게 감사하는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깎아지르는 듯한 기암절벽에 오금이 저려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순간의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쉐락볼튼의 하이라이트인 '계란바위'에서 인생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신기한 것은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용감하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무서워서 그 바위 위에 올라가지 못하는데, 바위 위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의 80%가 여성이었다. 나도 무서워서 못 찍었는데 아내는 용감하게 올라가 사진을 찍었다. 오히려 사진을 찍는 내가 더 무서워서 "빨리 내려와!"라며 난리를 쳤다.

자연이 주는 선물

정상에서 두 시간 정도 머무르며 그 절경을 만끽한 후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길에 계곡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에 맨발을 담갔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쉐락볼튼을 오르느라 고생한 발에게 피로를 씻어주는 자연의 선물이었다. 우리가 양말을 벗고 발을 담그니 다른 등반객들도 따라서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산에서 내려와 주차장 옆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에 쉐락볼튼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려 했지만 가게가 없어서, 어제 먹던 바나나와 땅콩으로 간단히 때워야 했던 탓에 배가 많이 고팠다. 미트볼과 연어 요리를 주문했는데, 요즘 이곳 음식에 질려서 맛으로 먹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먹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모처럼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새로운 자신감

쉐락볼튼 산행이 힘들다고 해서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되었는데, 무사히 산행을 마치니 돌아오는 발걸음이 너무나 가벼웠다. 쉐락볼튼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오를 정도로 아직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너무 대견했다.

나이가 들어가고, 2년 전 사고로 두 다리를 다친 이후로 건강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이틀 후에 올라갈 트롤퉁가도 큰 문제없이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쉐락볼튼은 단순히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자연의 웅장함 앞에서 겸허해지며, 동시에 자신의 가능성을 재발견하는 곳이었다. 노르웨이의 거친 자연이 우리에게 준 선물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아직도 할 수 있다'는 용기였다.

그 바위 위에 서서 천 미터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는 인생의 새로운 장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꼈다. 여행은 때로 우리에게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지만, 때로는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해준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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