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운 아침, 그리고 소중한 연결
또 하루의 아침이 밝았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마음이 한없이 가벼웠다. 아마도 여행의 끝자락에 다가서면서 생기는 여유로움과 어제 쉐락볼튼의 성공적인 산행 때문인 것 같다 . 호텔 방에서 오랜만에 데이터 걱정 없이 외손녀와 영상통화를 할 수 있었다. 화면 속 작은 얼굴이 한 달 사이에 부쩍 자란 모습을 보니 시간의 흐름이 새삼 놀라웠다. 발음도 조금씩 또렷해진 목소리로 "할부지!"라고 부르는 소리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런 작은 순간들이 여행 중에 느끼는 가장 소중한 기쁨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관통하는 인간의 의지
스타방에르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시작되는 터널들은 매번 나를 경이롭게 만든다. 거대한 암반 덩어리를 뚫고 이어지는 긴 터널, 터널을 나서면 깊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그리고 또 다른 터널. 이 모든 것이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르웨이인들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험준한 산길을 자전거로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자연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정신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 아닌가 한다. 노르웨이가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정신력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계 석유 매장량의 17-18%를 보유하고도 여전히 빈곤에 허덕이는 나라들을 떠올리니, 자원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는 인간의 의지와 지혜임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는 많은 발전을 이뤘지만, 지속가능한 번영을 위해서는 또 다른 차원의 도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 위의 거대한 꿈
페리로 바다를 건너 계속 오다로 향하는 길, 올렌스보그(Ølensvåg) 근처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호수에 떠 있는 거대한 해저 유전 시추 설비였다. 지금까지 카탈로그와 모형으로만 보았던 것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알아보니 이곳은 노르웨이 해양 산업의 중심지로, 웨스트콘 야즈(Westcon Yards)라는 대형 조선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본 시설은 이 조선소에 정박한 석유 시추 장비였다. 노르웨이가 북해 유전을 개발하며 해양 기술 강국으로 성장한 역사를 생각하니, 이 거대한 철골 구조물들이 단순한 산업 시설이 아니라 한 나라의 꿈과 의지가 구현된 결과물처럼 느껴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엄함 - 랑고스 폭포
한참을 달리던 중 멀리서 엄청난 크기의 폭포가 눈에 들어왔다. 차를 세우고 가까이 다가가니 그 위용이 더욱 압도적이었다. 랑고스(Langfoss) 폭포였다. 총 높이 612미터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폭포 중 하나이며, CNN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포 10곳에 포함된다고 했다.
이 폭포의 독특함은 직선으로 떨어지는 대신 바위면과 접촉을 유지하며 피오르드까지 흘러내린다는 점이라고 했다. 마치 거대한 은빛 리본이 산허리를 감싸 안으며 춤을 추는 듯했다.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무수히 반짝이는 모습을 보니, 자연이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예술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방에르에서 출발할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런 명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출발 때 네비게이션이 예고했던 호텔 도착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났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 여행의 묘미가 아닌가. 발길 닿는 대로 가다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멈춰서 감상하고 쉬어가는 것.
쌍둥이 폭포와 추억의 향기
다시 길을 떠나 한참을 달리는데, 이번에는 쌍둥이처럼 나란히 떨어지는 두 개의 폭포가 나타났다. 라테포센(Låtefossen) 폭포였다. 두 줄기의 물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자연이 연출한 듀엣 같았다.
폭포 근처 휴게소에는 담장을 따라 해당화가 피어 있었다. 대부분의 꽃들은 이미 지고 씨앗을 맺고 있었지만, 늦깎이 몇몇은 이제야 꽃을 피우며 계절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애틋하게 느껴졌다.
휴게소 곳곳에는 형형색색의 수석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각기 다른 색깔과 모양의 돌들이 저마다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수석들을 보는 순간 돌아가신 장모님이 떠올랐다. 살아생전 수석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여류수석회 활동을 하시며 많은 수석을 수집하셨던 분이었다. 지금은 그 유품들을 우리 집에 특별한 진열공간을 만들어 정성껏 관리하고 있다.
이역만리 노르웨이 땅에서 수석을 보며 장모님을 떠올리니,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마음은 국경을 초월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살아계셨다면 이 아름다운 돌들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여행의 끝자락에서
이렇게 계획에 없던 멋진 명소들을 구경하며 하루를 보내다 보니, 내일 긴 산행에 대비해 간식을 준비할 시간도 부족했다.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벌써 6시가 넘었다.
내일은 이번 여행의 최대 난코스이자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인 트롤퉁가(Trolltunga)에 도전하는 날이다. 편도만 11킬로미터에 달하는 험준한 산행이 기다리고 있다. 트롤퉁가는 노르웨이어로 '트롤의 혀'라는 뜻으로, 해발 1,180미터 높이에서 절벽 너머로 튀어나온 거대한 바위를 말한다. 이 바위는 빙하기 때에 형성된 것으로,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내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샷을 찍기 위해 이곳을 찾지만,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다. 왕복 22킬로미터의 거리와 8-10시간의 산행 시간, 그리고 변화무쌍한 날씨까지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그만큼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한다고 한다.
마음의 준비
호텔 방에 누워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니,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순간들로 가득했다. 랑고스 폭포의 장엄함, 라테포센 폭포의 조화로움, 그리고 수석들이 불러일으킨 따뜻한 추억까지. 여행이란 목적지도 중요하지만, 그곳에 이르는 과정에서 만나는 예기치 못한 순간들이 더욱 소중한 것 같다.
37일간의 긴 여행이 내일이면 절정에 다다른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설렌다. 트롤퉁가에서 바라볼 풍경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동시에 이 모든 여행이 끝나간다는 아쉬움도 밀려온다.
내일은 우리에게 또 어떤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까. 트롤의 혀라 불리는 그 신비로운 바위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게 될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일 밤, 우리는 평생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소중한 기억을 가슴에 품고 잠자리에 들 것이라는 점이다.
오늘밤 편안한 휴식으로 몸을 충분히 재충전하고, 내일 트롤퉁가에서 이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준비를 해야겠다. 37일간의 여행이 선사한 모든 순간들에 감사하며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