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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Oct 05. 2023

18 호박죽

호박죽을 먹어야 한다는 딸내미의 성화를 못 이기고 근처 지하상가 호박즙 가게로 향했다. 오늘도 주인은 온데간데없고 다보탑처럼 층층이 쌓인 늙은 호박들이 주인처럼 얌전히 문을 지키고 있었다. 

고운 주름 사이로 노란 윤기가 자르르한 호박, 덜 노래져 약간은 우울해 보이는 호박, 중간에 끼어 숨을 헐떡거리는 호박, 아직도 줄을 맞추지 못하는 신입생처럼 삐죽 나와 있는 호박. 나를 보고 모두들 ‘아침부터 웬일이냐’는 듯 퉁명스럽다. 

지난번처럼 옆 식당 아저씨가 주인한테 전화를 하더니 이미 즙을 내기로 맞춰져 있는 호박들이라 팔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농수산물 시장에 가면 어디에서 호박을 판다고 친절하게 알려주는데 나는 건성으로 흘려듣고 벌써 계단을 서너 개 오르고 있었다.      

호박에 무슨 효능이 있는지 잠깐 찾아봤다. 

호박중에서도 늙은 호박은 애호박보다 식이섬유, 철분, 비타민 A, 베타카로틴, 비타민 B2, B3가 풍부하며, 칼슘은 단호박보다 약 7배, 철분은 2배 많이 들어있어 항암 효과, 눈질환 예방, 면역력 강화, 항산화 효과, 변비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산후 붓기가 있는 환자에게도 권장된단다. ‘나 애 낳았을 때도 먹어보지 못했는데 웬 호박죽이냐’던 아내의 불평스러운 한마디가 아직도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차를 몰고 농수산물 시장으로 달려갔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몇 시간 새 부쩍 굵어졌다. 몇 달간 아무 일 않고 겨울을 즐겼던 와이퍼가 비지땀을 흘리며 빗물과 사투를 벌이는 사이 시장 입구에 다다랐다. 간간이 어디선가 오늘도 어김없이 구급차 사이렌이 울렸고, 또 견인차들은 게걸스럽게 먹잇감을 물고 바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한가할 때가 아니다. 늙은 호박을 구해야 한다. 여기저기 배추, 무, 오이들이 널려 있는 걸 보니 농수산물 시장이 맞다. 어디에 늙은 호박 파는 데가 있나. 두리번두리번, 대충 몇 바퀴를 둘러보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상추 파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바쁜데 왜 물어보냐는 듯 고개를 젓는다. 아까 아저씨가 말할 때 잘 들을 걸 그랬다.


처음 입구부터 다시 지뢰 탐지병처럼 가게 하나씩 조심스럽게 정밀 탐색을 시작했다. 실로 오랜만에 둘러보는 시장이다. 고추, 상추, 당근, 부추, 마늘. 다들 말쑥하게 차려입고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응, 그래도 너희들은 아니야. 나는 호박이 필요해. 굵은 손마디로 1,500원짜리 깻잎을 정성스럽게 봉지에 담고 있는 할머니에게 나도 모르게 5,000원짜리를 내밀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두 봉지에 2,000원이라며 3,000원을 거슬러준다. 어젯밤 늦게 한참 동안 전화기를 붙들었지만, 한마디도 못 알아들으시고 큰소리만 지르시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몇 바퀴를 돌았나. 드디어 아까 그 가게에서 본 듯한 호박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밤새워 일출을 기다리다가 세찬 구름 속을 뚫고 장렬하게 솟아오르는 태양을 본 것처럼 경이로웠다. 한걸음, 또 한걸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행여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니겠지. 난생처음으로 “호박이 얼마인가요?”라며 최대한 공손하게 여쭤보았다. 아저씨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가게를 한 바퀴나 돌며 물건을 정리하더니 이내 “7,000원이요”라고 했다. 아니 이렇게 쌀 수가! 생각 같아서는 거기에 있는 호박들을 모두 사고 싶었다. 횡재를 한 것 같았다. 선택받지 못한 호박들의 상심한 표정을 뒤로하고 시장을 나왔다.      

이제는 호박죽이다. 지금부터 호박죽을 끓여야 한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계백 장군처럼 비장한 각오로 심호흡을 크게 하고 도마 위에 호박을 올려놓았다. 반갑다. 늙은 호박님. 굵은 주름을 보니 언뜻 보아도 나이는 나보다 한참 많아 존댓말을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난 단호하게 호박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부터는 내 명령에 따라야 한다.’


날렵한 동작으로 깨끗하게 씻은 호박을 4등분으로 잘랐다. 기대했던 금은보화는 간데없고, 수천 개의 가느다란 실줄과 호박씨들이 차분하게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줄과 호박씨들을 긁어 후라이팬에 넣고 물을 부은 후 데우기 시작했고, 4등분 된 호박을 다시 번개처럼 72등분하여 껍질을 벗겨낸 후 또 다른 프라이팬에 넣고 삶기 시작했다. 얼마나 삶아졌을까? 이번엔 적당히 삶아진 호박들을 꺼내어 믹서에 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노랗게, 너무나 노랗게 원을 그리며 터무니없이 더 노래지려는 결정적인 순간 전원을 끄고 프라이팬 속에 끓고 있던 호박씨, 씨줄을 건져내고 믹서에 들어있던 호박즙을 들이부었다. 

과연 이것은 호박죽인가.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던 나무 주걱이 놀라지 않게 오른손에 들어 프라이팬 속의 호박죽을 젓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미리 불려놓은 찹쌀 한 주먹을 믹서에 돌린 다음 천천히 간절한 마음으로 끓고 있는 호박죽 속으로 던져 넣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다. 다시 한번 주걱이 힘을 냈다. 주걱에도 내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하다. 노오란 호박죽이다.

큰 소리로 딸을 불렀다. 호박죽 먹어라! 지난주 쌍꺼풀 수술을 했던 딸이 어디서 들었는지 붓기 빼는 데는 호박이 최고라고 호박즙을 사달라고 해서 사줬더니 몇 숟가락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오늘은 호박죽을 해 달라고 했다. 쌍꺼풀을 주지 못한 심한 죄책감과 한편으로 아빠에 대한 기억 한 장을 남겨주려는 나의 극성으로 오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평소 같으면 ‘맛없다’고 한마디 했을 애가 아빠의 정성을 알았는지 아무 말 없이 숟가락질이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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