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저녁 모임에서 예정에 없이 테니스를 좋아하시는 어르신과 주말에 한 게임하자고 약속을 했다. 새벽 5시 30분 출발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모임 장소가 영종도였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오랜만에 시합이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 시간의 고요가 좋다. 남들보다 빨리 일어나면 늘 주머니가 두둑한 느낌이다. 살금살금 베란다로 다가가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인사도 없이 한 무리의 안개가 휙 나를 밀치고 들어왔다. 안개를 보니 날씨가 좋을 모양이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마도 내가 오늘 첫 손님인 모양이다. 주차장이 워낙 부족하여 관리 규칙이 새로 개정되었다는 안내문이 거울 옆에 붙어 있다. 한 세대당 2대까지는 무료이고 3대부터 5대까지 주차료를 부과한다는 내용이다. 두 대 까지는 이해가 가나 한세대에 다섯 대도 있다니…… 주차 공간이 부족한 이유를 이제 알겠다. 자주 신문에서 보는 뉴스가 떠올랐다. 때만 되면 판에 박은 듯 서울 주택 부족, 제3기 신도시 발표. 세 살짜리가 서울에 아파트 25채 보유에서부터 임대업자가 450채 보유라는 뉴스까지…
어젯밤에 차를 빼기 좋은 곳에 주차해 두었다. 거기는 경비실과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곳이라 딱 2대만 주차를 할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엄두도 못 낼 로열공간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다른 차와 내 차에 걸쳐 덩치 큰 SUV 한대가 떡 하니 이중주차가 되어 있었다. 이중주차야 흔한 일이지만 하필 오늘 같은 날 그것도 큰 차라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가볍게 몸 푼다는 생각으로 차를 밀었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사이드브레이크를 걸어놓은 모양이다.
연락처도 적혀 있지 않았다. 참으로 난감했다. 지금 출발해야 약속한 6시에 도착할 수 있는데……. 벌써 5분이 지나갔다. 불행 중 다행히 SUV 차는 내 차 왼쪽을 조금 걸치고 있어 잘하면 나가는 것이 가능할 듯도 했다. 궁리 끝에 앞에 있는 분리수거장에 있는 종이박스를 다섯 개를 가져와 인도턱 밑에 쌓고 그 위로 조금씩 방향을 틀어봤다. 차에서 내렸다, 올랐다를 반복하며 땀을 뻘뻘 흘린 끝에 빠져나왔다. 또 10분이 훌쩍 지나갔다. 화가 났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주차를 해 놨을까!
출발 전 미리 전화를 해서 깜빡 늦잠을 자 15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어르신은 ‘그럴 수 있지, 지금 안개가 많이 끼었으니 운전 조심해서 천천히 오라’고 거듭 당부까지 했다. 왜 늦느냐고 불평하는 대신 늦어도 괜찮다며 마치 방금 전 내 끙끙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나를 위로해 주니 고마웠다.
인천대교에 다다랐다. 차를 빼느라 테니스 몇 게임을 친 것처럼 아직도 이마에 땀이 마르지 않았다. 지난해 전 테니스 칠 때 일이 번뜩 생각났다. 캐나다 유학에서 갓 돌아온 동료와 파트너가 되어 게임을 했다. 당시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때라 식당에 갈 때마다 줄을 서고 일일이 접종 여부를 확인하던 때였다. 경기는 참으로 흥미진진했다. 나는 수시로 파이팅을 외치는 성격이었다.
코로나 영향으로 손을 맞대는 대신 라켓 헤드만 서로 부딪히는 것으로 하이파이브로 대신하던 때였다. 게임스코어 5:4의 매치포인트에서 파트너의 강력한 스매싱으로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파트너에게 달려가 오른손을 들었다. 파트너가 재채기를 하며 왼손으로 입을 가리는 것을 보았다. 내가 달려가자 파트너는 순간적으로 라켓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을 한번 닦은 후에 하이파이브를 했다. 평소 그의 모습다웠다. 그 짧은 순간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오른손이라니. 배려란 그런 것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내 손을 바라봤다.
사회가 각박해졌다.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은 아랑곳없이 나 자신, 내 자식, 내 가족만이 먼저다. 상대방을 전혀 생각지 않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전철과 버스에 큼지막하게 임산부 배려석, 노약자 배려석이 지정되어 있다. 몇 해 전 특수학교가 들어선다는 지역에서 동네 사람들의 엄청난 반대가 이어졌다. 특수학교를 보내려고 무릎을 꿇고 호소하던 어머니들의 눈물겨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 아들, 내 딸이 특수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해도 반대할 것인가. 최근에는 선생님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종종 보도된다. 여전히 내 아이만 소중하다는 생각이 급기야 선생님을 극단의 선택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운전 중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다짐까지 하는 사건을 거의 하루가 멀다 하고 접한다. 어제 사건도 그랬다. 가해자는 화성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앞서가던 피해자가 브레이크를 한번 밟았다는 이유로 화가 났다. 가해자는 2차로로 달리던 피해차 앞으로 진로변경을 하여 브레이크를 밟고 또 3차로로 피하는 피해자 앞으로 다시 끼어들어 브레이크를 밟고 20분 동안을 피해자 옆에서 나란히 주행하는 등 약 10킬로미터 정도를 피해자를 위협하며 운전하였다는 것인데 생각만 해도 오싹하지 않은가. 조수석에는 피해자의 아내가 타고 있기까지 했는데.
어느덧 코트에 도착했다. 나보다 10살 연배가 위인 어르신이 크게 파이팅을 하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경기를 하는 내내 지난번 하이파이브를 했던 동료의 손이 자꾸 눈에 어른거렸다. 오늘은 맘껏 하이파이브를 해도 상관없다. 예감대로 날씨는 화창했고, 경기는 2시간 내내 즐거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전경력이 20년이 되어 어느 정도 앞가림은 한다. 얼마 전까지는 누군가 내 앞에 끼어들려고 하면 눈을 부릅뜨고 주춤주춤 틈을 주지 않고 견제를 했다. 그러다 보니 얼마 안 걸리는 출근 길이 심히 피곤했다. 생각을 바꿔 봤다. 웬만하면 양보해 주기로. 먼저 상대방을 생각해 봤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순간 잘못해서 제 차선을 못 타지 못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양보하니 마음이 편해지고 조바심도 사라졌다. 운이 좋아 상대방이 비상등이라도 깜빡여주면 아침부터 작은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뿌듯하다. ‘제대로 된 사람이네’라고 맘속으로 칭찬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너무 빨리 변해서일까. 계절에 관계없이 사회 곳곳이 압력 밥솥처럼 펄펄 끊는 느낌이다. 아마도 화를 참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 일 것이다.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 내가 이겨야 하고 절대 손해 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도배가 된 사회. 배려가 없는 사회는 마치 화약을 실은 기차가 서로 마주 보며 달리는 것과 다름없다. 궁극에는 누군가 승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피해자가 되고 패자가 되는 것이다. 가해운전자가 처벌을 받은 들 피해자가 입은 마음의 상처가 쉽게 아물 수 있을까. 70년대 새마을운동이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성장하게 했다면 이제는 범국민적으로 ‘역지사지 운동’을 벌여야 할 때란 생각이 든다. 더 늦기 전에. 생각해 보자. 오늘도 부지불식간에 어딘가에서 이중주차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