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 20분. 기숙사 선생님이 각 방 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기상을 재촉한다. '起来,起来.(치라이, 일어나) 고함을 지르고 문을 두드린다. 한 방마다 '쿵, 쿵, 쿵' 대략 일곱 차례씩은 두드리는데 여간 듣기에 거슬리는 게 아니다. 기숙사에 들어온 지 넉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적응이 덜 된 것인지. 두드리기 전에 나는 벌써 자동적으로 잠이 깨어 있었다. 아들은 피곤한지 꿈쩍도 않는다. 어제 아내가 국제택배로 보내온 책 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좀 늦게까지 읽고 잠자리에 들어서 그런 것 같다. 7시 30분. 더 타협은 없다. 세수하고 머리 감고 밥 먹으려면 이제는 일어나야 한다. 몇 차례 재촉에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오늘은 샴푸로 머리 감는 대신 그냥 물로만 적시고 있다. 나보고 물을 받아 달라고 하고는. '아빠가 중국까지 너 시중들러 왔냐?'는 말이 툭 튀어나오려다 말았다. 세숫대야 두 개에 적당히 따뜻한 물을 받아 주었다. 어떤 때는 샴푸까지 머리에 묻혀 감겨주기도 했는데 오늘은 운이 좋다.
아침은 누룽지다. 어제 아내가 책과 함께 보내온 그 누릿누릿한 빛이 감도는 누룽지. 이름은 누룽지지만 그 아내의 사랑이 누렇게 색칠되어 있다. 쿤밍 생활도 20일 정도 남았다. 아들은 누룽지와 짜짜로니, 컵라면을 보고 감격해했다. 쿤밍생활은 쉽지 않았다.
화장실까지 딸린 이 좁은 방에서 한동안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곧장 운운장으로 갔고 운동장을 돌고 체조를 한 뒤 아침을 배식 받았다. 중국 학생들과 똑 같이 생활하려다 보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얼마 전부터 담임선생님께 허락을 받고 아침 체조는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가장 큰 고민은 점심. 기름기 가득한 반찬들을 보온 도시락 같은 그릇에 마구 퍼 주었는데 도저히 먹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한 달 전부터 오전 3교시만 했다. 에고 가엷어라! 원래대로라면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오전 수업하고, 12시부터 12시 40분까지 점심을 먹은 다음 기숙사로 돌아와 2시 10분까지 낮잠을 자고 오후 2시 30분부터 5시까지 오후 수업을 하는 일정이었다.
8시가 되자 아들은 학교에 갔다. 학교는 기숙사에서 3분 거리다. 쿤밍에 오자마자 학교를 정하지 못하고, 윈난 성 4박 5일 여행을 갔다 와서 단번에 정해 버린 중국 소학교다. 한국이라면 올해 6학년 1학기인데 중국은 9월에 신학기가 시작되는 관계로 다시 5학년에 들어가는 걸로 해서 5학년 2반으로 입학했다. 한국 학생은 아들 한명이다. 생면부지의 낯선 외국 학교에서 생각보다 잘 적응했다. 물론 중간에 중국 학생과 코피가 터지도록 심하게 한번 싸운 적은 있지만.
11시 5분. 3교시가 끝났다.
오후에는 나와 같이 운남대학에서 가서 1시 15분부터 3시 25분까지 중국어 수업을 들어야 한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데 4교시 시작 시간까지 중국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있다. 쉬는 시간에도 애들이 탁구와 농구를 쉬지 않는다. 시작종이 울리자 교문을 나와 67번 버스를 타고 강동화원 앞에서 내린 다음 다시 강동화원에서 96번 버스로 갈아탔다. 다행이 오늘도 빈 자리가 있었다. 기분이 좋은 날이다. 이렇게 앉아서 가는 것이 얼마만인가! 버스는 요금은 1원짜리와 2원짜리가 있는데 에어컨이 되는 96번은 2원이다. 중국돈 1원이 우리나라 돈으로는 180원 정도 된다. 신문도 보통 1원이다. 비싸서(?) 신문 사는 것은 포기했다. 한국에서는 버스 타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차가 없으니 오고 가는데 약 50분 걸리는 버스를 탄다. 예전에는 버스가 조금만 늦어도 짜증이었는데 얌전히 기다리는 것을 보니 참을성이 꽤 생긴 모양이다. 기특해라!
11시 55분 운남사범대학 앞에서 내려 육교를 지나 조선족 식당 '아리랑'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오늘 메뉴는 돌솥비빔밥. 그리고 라면, 떡볶이 다 합쳐서 45원(약 9,000원)이다. 한 달 내내 아리랑 옆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더니 이젠 물렸다. 그래서 오늘은 조선족 사장이 운영한다는 아리랑으로 간 것이다. 라면 맛이 한국보다 더 낫다고 아들은 말하는데 내 솜씨만은 못한 것 같아도 제법 라면 맛이 난다. 떡볶이에는 어묵이 없다. 그 많던 어묵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식사를 마치고 12시 30분쯤 운남대학 도서관 앞에 있는 농구장 앞 나무 밑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아들이 농구를 하고 싶은데 오늘은 공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혼자 농구를 하는 중국 아저씨에게 슬며시 다가가 같이 농구를 한다. 중국 오기 전에는 농구는 거의 하지 않았는데 중국 소학교에 들어가고부터 탁구와 농구를 하더니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벌써 나보다 더 드리블 솜씨가 낫다. 1시 16분부터 3시까지 중국어 수업을 듣고 숙소로 향했다. 오늘은 학교에서 4시에 체육시험이 있는데 다른 시험은 몰라도 체육시험은 꼭 보고 싶다고 해서 좀 일찍 끝낸 것이다.
돌아올 때는 운남대학 남문 앞에서 139번(마을버스)을 타고 두 코스 가서 내린 다음 96번을 탔다. 날씨는 여전히 구름 천지다. 쿤밍은 구름천국이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 몇 시간째 천둥을 치며 변죽만 울리고 있다. 쿤밍에서 듣는 천둥소리는 얼마나 큰지 귀가 얼얼하다 금세 건물을 날려버릴 것처럼 험상궂다. 며칠간 천둥소리에 잔뜩 겁을 먹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곳이 해발 1900여 미터였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들으니 어찌 그 소리가 요란하지 않겠는가? 어제 운남대학 매점에서 69원(한국도 13,000원 정도)이라는 거금을 주고 우산을 샀는데 오늘도 비가 오지 않고 있으니 이거 참. 이렇게 잔뜩 구름이 끼고 비는 오지 않는 날씨가 좋다. 해만 나오면 그 강렬함이 얼마나 센지 오래 있으면 아픈 느낌까지 든다.
3시 45분쯤 학교 갈 때 버스를 탔던 강동화원에 내렸다. 내림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전동오토바이 아저씨가 있는지를 확인하는데 오늘은 딱 한 명이 있었다. 이미 습관이 되어 아저씨에게 손짓을 했다, 요금은 5원(한화 900원)이다. 비싸긴 해도 걸으면 10분 정도 거리를 둘이 타고 씽,씽.씽 버스 사이를 뚫고 질주하면 금세 소학교에 도착이다.
아들은 체육시험을 보고 돌아왔다. 저녁을 먹으러 윈난한국국제학교로 가려는데 갑자기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국제학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저녁은 또 짜짜로니로 해결했다. 그리고 아들은 아내가 보내준 책 중 '해저 2만 리'를 7시 40분까지 읽고 노트북 앞으로 다가간다. 오늘도 변함없이 무한도전 다시 보기를 본다. 8시 40분까지 인터넷을 하고 나서 키를 재 볼 테니 도와달라고 했다. 오늘 재본 아들의 키는 1미터 52. 많이 컸다. 키 만큼 마음도 커야 할 텐데……
다시 책이 재미있다고 9시 40분까지 책을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 7시에 깨워달라는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