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밍에 둥지를 튼 지 2주일 밖에 안 되어 집도 아이의 학교도 정하지 못한 채, 윈난성으로 4박 5일간 여행을 떠났다. 마음은 급하지만 일단 정착을 위해서는 정중하게 이곳의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이 예의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석림(石林) - 구향(九乡) - 대리(大理) - 여강고성(丽江古城)- 차마고도(茶马古道)까지. 가이드 포함하여 일행은 모두 11명. 도사님 부부와 그 일행 여사님 두 분, 상해에서 온 젊은 부부, 그리고 풍경님, 다다님, 거거님. 모두들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들이었는데 특히 도사님과 풍경님은 풍부한 여행 경험과 넘치는 유머 감각으로 여행 내내 가이드를 대신했다.
2011년 2월 22일 아침 여덟 시. 쿤밍에서 버스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석림으로 향했다. 중형버스인데 금방이라도 바퀴가 떨어져 나갈 듯 덜커덩덜커덩 난리다. 안전벨트를 매어야겠는데 보이지 않았다. 앞뒤를 휘휘 둘러보았는데 나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안전벨트 없이 석림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는지 걱정이 되었다.
두 시간쯤 지나자 차창 밖으로 하나둘 보이는 돌 무리들. 말로만 듣던 석림의 시작이었다. 나무는 보이지 않고 돌들이 기립한 채 한국에서 온 낯선 이방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입장료는 어른 170원, 어린이는 할인하여 130원. 입구에 작은 연못이 있고 연못 주위에 크고 작은 돌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간지럼을 태우고 있다. 조금 더 들어가 보니 본격적인 석림이다. 그야말로 바위 숲이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이 돌 뒤에 돌, 돌 앞에 돌. 온통 돌 숲이다. 작은 놈이건 큰 놈이건 하나같이 평화롭다. 언제 누가 여기에 이런 돌 동산을 만들어 놓았을까. 어느 돌 하나도 속 시원하게 내게 말을 해주지 않는다.
앞선 사람들이 바위 숲에 갇혔는지 보이지 않는데 누구 한 사람 구조를 외치는 사람이 없다. 억겁의 세월을 이 자리에서 괴로워하고, 외로워하고, 깎이고 지새운 밤들이 얼마더냐! 바위들은 모두 배가 불러 벨트를 풀어 젖힌 것처럼 평화롭다. 내가 보는 대로 따라 보고 내가 웃는 대로 따라 웃고, 같이 뛰다가 멈춘다. 한참을 뛰었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나도 여기에 이대로 서서 눈을 감으면 돌이 될까. 두드리면 통, 통, 통 투명한 소리가 난다는 바위 옆을 지나가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드렸는지 반들반들 내 콧수염이 보이는듯하다. 치마바위, 코끼리바위, 철모바위, 창바위 각자 최고인 듯 교만한 것 같지만 말 한마디 없다. 겸손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우쭐거릴 법도 한데 아직까지 한 번도 자기 자랑을 늘어놓은 적이 없단다. 이 아름답고 거대한 돌 숲이 이곳 중국에 있다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득 담고 구향동굴로 향했다.
40분쯤 달려 구향동굴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54미터에 이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동굴로 내려가니 휘황찬란한 불빛에 자태를 뽐내는 자웅폭포, 계단식 논처럼 생긴 연못 신전, 웅사대청이 줄지어 인사를 한다. 한국에서 고수동굴을 가본 적이 있는데 구향동굴의 규모는 정말로 중국스럽다. 동굴탐험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 가마꾼들이 모여 있다. 수백 개의 계단을 가마꾼 네 명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중국 어린애 한 명을 태우고 올라가고 있다. 가마꾼의 땀방울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선처럼 누워 있는 어린애를 보니 말 그대로 ‘소황제’ 모습 그대로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버스를 타고 쿤밍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10시에 쿤밍역에서 대리행 잉워(눕는 좌석) 기차를 탔다. 3층으로 된 침대칸이었는데 나는 맨 위에, 아들은 낙상 염려 때문에 1층 침대칸에 몸을 뉘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집에서도 잠을 잘 못 자는 성격인데 기차 안이 시끄럽고, 이상한 놈들(?)이 자꾸 기웃거리는 것 같아 온 밤을 뜬 눈으로 샜다.
눈을 떠보니 대리역이다. 새벽 여섯 시. 새벽인데도 역 앞은 시끌벅적했다. 5마오(1원의 절반)를 내고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 후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차를 타고 선착장으로 향하는데 이런. 일행 중 여사 한분이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했다. 중국은 아직도 공중화장실이 유료였다. 몇 번이고 상황을 되짚어보는데 대충 각이 나오는 모양이다. 대리역에 내리자마자 공중 화장실로 갔는데 요금을 지불하려고 하니 잔돈이 보이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여행경비를 몽땅 넣어둔 봉투 속에서 돈을 꺼내 지불했는데 그때 주위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소매치기가 뒤를 따라다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꺼내간 것 같다고…… 가방 자크가 열려 있었고, 몇 번을 확인했는데 돈 봉투는 온데간데없단다. 자그마치 5000원(한화 약 90만 원. 모두들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고 한 마디씩 한다. 좀 전에 식당에 들어갔을 때 어떤 중국 사람이 일부러 무언가를 바닥에 흘려 주의를 끄는 걸 봤는데 분명 소매치기 일당 같다고 했다. 일단 돈 많은 것이 노출되면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여권은 무사하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위로하면서 선착장에 도착했다.
백 년 동안 잠을 자고 있다는 洱海(얼하이) 호수
호수인데 바다만큼이나 넓어서 洱海라고 한단다. 유람선을 타고 약 2시간 정도 호수 위에서 유람을 하고 중간에 삼도차 공연을 관람했다.
삼도차는 백족의 전통차인데 이 이름은 마시는 차 이름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방법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원래 백족이 손님을 접대하면서 마셨던 것인데, 이 차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 가지 방법에 따라 세 가지 맛을 내는데, 그 맛들은 사람의 인생에 비유된다. 첫 번째 차는 쓴맛을 내며 운남의 녹차를 사용하는데 소년기의 쓰라림과 고통을 뜻하고, 두 번째 차는 달콤한 맛을 내며 앞의 녹차에 치즈, 호두, 설탕 등을 넣는데, 중년기의 행복함과 인생의 즐거움을 뜻한다. 세 번째 차는 달콤하면서도 쓴맛을 내며 녹차에 벌꿀, 들깨, 생강, 흑설탕 등을 넣는데 추억의 차라고도 불리며 인생 말기에 지난날의 즐거움과 고통을 회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몇 잔을 연거푸 마셨는데 도대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푸르디푸른, 맑고 맑은 물빛에 취해 잠시 조는 사이 어느덧 남조풍정도에 도착했다. 남조풍정도는 얼하이호수 안에 있는 작은 섬이다.
먼 옛날 윈난성에는 150만 명에 이르는 백족(白族)들이 살고 있었는데. 백족들은 약 3000년 전부터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으며, 8세기경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남조국(南沼國,737-902)을 건설했다. 남조국은 중국 남서부 일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미얀마 북부까지 장악하였다. 남조국은 250년간 윈난성을 통치하며 세력을 떨쳤으며, 다리는 버마로드의 중심도시로 발전하였다. 남조풍정도는 원래 남조국의 왕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섬이다. 그 후 남조풍정도는 왕족들의 휴양지로 이용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며 이곳에는 백족의 공동묘지로 변해버렸는데, 1997년 중국정부가 무덤을 모두 이장시키고 1억 위안(한화 약 185억원)을 들여 지금과 같은 관광지로 단장을 하였다고 한다.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던 그 힘찬 말발굽 소리가 귓전에 울려 퍼지는듯한데 얼하이는 백 년 동안 잠이 든 공주처럼 말이 없다. 정원 같은 고성을 한 바퀴 둘러보고 여강고성으로 출발하는 차에 올랐다. 여강까지는 4시간 남짓. 석림을 가는데 4시간, 어제 잉워 타고 대리까지 9시간. 이제 또다시 4시간 더 덜컹거리는 차 탈 생각을 하니 심기가 불편하다. 다행히 석림에서 돌아오는 길처럼 비포장은 아니었다. 저녁 7시쯤 고성에 도착했다. 추운 곳에 오래 있다가 화롯가에 앉은 것처럼 고성은 그렇게 아늑했다. 객잔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갔다. 골목은 온통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발갛게 수줍어하는 수많은 등불들 사이로 고성의 밤은 깊어 가는데…….